연예인만 모시기 … 감동은 팽개친 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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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시구가 연예인의 홍보 무대가 되고 있다. 자극적인 의상으로 가족 단위 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 약자를 초대해 감동을 주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시구와 비교되는 점이다. [중앙포토]

프로야구 마운드에 연예인과 섹시스타가 넘쳐난다. 하지만 감동은 없다.

 최근 프로야구 구단들은 앞다퉈 유명 연예인을 시구자로 내세우고 있다. 정정당당한 승부의 시작을 알리는 야구만의 이벤트가 연예인의 홍보무대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연예인들은 많은 미디어와 팬들이 주목하는 시구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 하고, 야구단도 연예인 시구를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1 2년 넘게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주둔지에서 근무한 윌 애덤스가 지난달 17일(한국시간) 딸 엘레이나의 시구를 받는 포수로 깜짝 등장했다. 공을 던진 뒤 아버지인 걸 알아챈 딸은 포옹을 하며 펑펑 울었다. 2 유방암에 걸린 마이애미 말린스의 명예 배트걸 아나 산체스가 지난달 20일 시구를 하고 있다. 3 보스턴마라톤 테러로 두 다리를 잃은 제프 바우먼이 지난달 29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기에서 시구를 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경기장으로 나오고 있다. [뉴시스]

 최근 서울 연고의 한 구단은 관능미를 강조하는 여성 연예인을 시구자로 올렸다. 속옷 선이 드러날 정도로 밀착된 바지와 가슴이 깊게 파인 상의를 입은 그는 능숙한 자세로 공을 뿌렸다. 각종 포털사이트는 섹시스타의 투구동작 사진을 메인 화면에 걸었다. 시구를 지켜본 야구 팬 김영민(28)씨는 “가족과 함께 야구장을 찾았다. 시구자가 지나치게 야해 보기 민망했다. 야구장이 연예인의 무대가 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수년 전만 해도 연예인 시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야구 팬이나 유소년 선수, 다른 분야의 인사들이 시구·시타자로 자주 등장했다. 그러나 야구를 좋아하는 몇몇 연예인이 시구자로 나와 화제를 모으자 트렌드가 확 바뀌었다. 대중문화평론가 장덕현씨는 “연예인들의 선정적인 시구가 포털사이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승부보다 연예인이 더 강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단 입장도 난감하다. 과거 평범한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을 초청했지만, 정작 이슈가 되는 건 스타뿐이기 때문이다. 한 수도권 구단 관계자는 “야구를 사랑하는 팬과 사회적으로 귀감이 될 수 있는 분을 시구자로 모시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관중의 호응이 높은 연예인을 못 본 척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는 시구 이벤트에 의미와 감동을 담는다. 지난달 17일(한국시간) 템파베이의 홈구장 트로피카나 필드에선 부녀를 위한 특별한 시구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주둔지에서 육군 중령으로 근무하던 윌 애덤스는 딸 엘레이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일주일 일찍 미국으로 돌아왔다. 해외 근무 때문에 2년 넘도록 만나지 못했던 딸을 위해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다. 시구자로 마운드에 오른 엘레이나는 힘차게 공을 던졌다. 엘레이나의 공을 받은 포수는 마스크를 벗었다. 아빠 애덤스였다. “아가야. 아빠는 너를 사랑한단다.” 깜짝 놀란 엘레이나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팬들은 부녀의 눈물만큼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배려와 팬서비스에 신경을 많이 쓴다.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는 톰 윌리스(53)는 2011년 6월 8일 보스턴의 홈 구장 펜웨이파크에 시구자로 초청됐다. 발가락 사이에 공을 낀 그는 포수 미트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큰 포물선을 그린 공이 포수 미트에 닿자 선수들과 팬들은 환호를 보냈다. 윌리스는 미국의 모든 야구장에서 시구를 하는 게 목표다. 감동이 사라진 한국 야구장에선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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