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밉지만 방법은 절전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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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3기 추가 가동중단 사태로 결국 올 것이 왔다. 올여름 예상되는 사상 최악의 전력대란이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3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사태)을 100% 배제할 수 없다. 어떤 상황이든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윤 장관은 이어 “8월 둘째 주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예비전력이 마이너스 198만kW까지 하락하는 초유의 상황이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이날 산업부는 ▶공공기관 전력 20% 감축 ▶피크시간(오후 2~5시)에 전기요금 3배 물리기 ▶대형건물 냉방온도 섭씨 26도 이상 제한 등을 골자로 한 전력수급 대책을 내놨다. 요약하면 전력을 쓰지 말아야 하며, 많이 쓰면 요금을 더 물리겠다는 얘기다. 사실 우리나라 전력사정상 절전 말고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결국 정부가 벌인 사고를 국민과 기업이 뒤집어쓰는 꼴이 됐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력이 문제”라며 “전력 수급 안정은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매번 전력난을 겪으면서도 공급 확대 대책은 별다른 진전이 없다”며 “임기응변식 절전 대책 대신 근본적인 수급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질타했다.

 윤 장관은 “원전 사고 고통을 기업에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지적에 이렇게 답했다. “대기업 대책과 관련, 인위적인 조치가 아니다. 기업이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절전 규제다. 위기 상황에서 다 같이 동참하면서 불편과 어려움을 나눠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기업들은 전력수급 사정이 빠듯하긴 하지만 정부 방침에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블랙아웃 상황으로 갈 경우 기업이 입는 피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의 최광림 전력조정실장은 “대한상의 절전운동본부를 중심으로 정부의 절전 대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전력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삼성은 다음 주 종합대책을 내놓을 예정이고 현대기아차·LG전자·롯데백화점·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들이 속속 절전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잘못을 되레 떠안은 심정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최광림 전력조정실장은 “전력부족 현상이 매년 반복돼 기업활동에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기업전력 사용량의 90% 이상은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전력이어서 절전에 한계가 있다. 매번 쥐어짜기식으로 하면 전력난은 반복된다”고 꼬집었다.

 산업부 대책에는 ‘한 등 아닌 두 등 끄기’ 운동 같은 에너지 절약 캠페인까지 등장했다. 마치 1970년대 오일쇼크 때 ‘한 집 한 등 끄기’ 운동을 보는 듯하다. 이번 전력난이 옛 구호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산업부는 1000만 가구가 100W만 줄이면 원전 1기 생산량(100만kW)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상당수 국민도 정부 행태가 괘씸하긴 하지만 절전에 동참하는 것 외에 묘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주부 신윤희(38·서울 신대방동)씨는 “2011년 블랙아웃이 또다시 발생할까 걱정돼 미리 전력을 아끼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서균렬 교수는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대처를 잘했다. 정부는 지금의 심각성을 잘 알려서 국민 이해를 구해야 한다. 국민들도 협력하지 않으면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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