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고통 분담 없는 시간제 일자리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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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노총과 경총, 고용노동부가 그제 시간제 일자리 확대에 합의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주축인 민노총이 빠진 게 아쉽지만,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만들자는 데 노·사·정이 최종 합의한 것은 의미가 깊다. 물론 합의안을 들여다보면 실망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세부적인 목표나 구체적인 계획, 합의안을 관철하기 위한 강제 규정은 찾기 어렵다. 오로지 ‘노력하겠다’ ‘협력하겠다’는 추상적인 표현만 넘쳐난다. ‘고용률 70%’라는 청와대의 압박에 노·사·정이 설익은 합의로 서둘러 봉합한 게 아닌지 의문이다.

 박근혜정부가 고용률 70%를 달성하려면 5년간 25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힘겨운 목표다. 거듭 강조하지만,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 ‘고용 없는 성장’이란 문제에 앞서 ‘성장 없는 고용’은 아예 불가능하다. 최근 수출 대기업들의 고용 흡수력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설비투자를 하더라도 해외에 공장을 짓거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동화 설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생존 기반이 흔들리는 중견·중소기업들은 현재의 고용 수준을 유지하기도 벅차다. 창조경제의 주인공인 벤처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는 서비스업은 규제 완화가 지지부진해 게걸음을 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시간제 일자리 확대’는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다. ‘시간제 일자리=좋은 일자리’라는 표현부터 모순이다. 김대중정부 이후 수없이 시간제 근무 실험을 했지만 대부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업률 수치를 분식하기 위한 땜질식 처방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시간제 일자리가 늘어나면 출산·육아로 경력 단절이 생긴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입에는 숨통을 틔워줄지 모른다. 하지만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고 고용률을 끌어올리는 근본 처방이 아니다. 2003년 독일의 ‘어젠다 2010 구조개혁’이나, 1982년 노·사·정 고통 분담을 전제로 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과 한참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시간제 일자리 확대가 유일한 차선책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연간 노동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300시간이 긴 2100시간이다. 노동 시간을 줄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시간제 근로를 확대해 일자리를 나누는 수밖에 없다. 정부가 시간제 근로자의 고용 안정성을 정규직과 차별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시간제 일자리 실험이 성공하려면 그제와 같은 ‘껍데기 협약’으로는 어렵다. 공공 분야의 경우 정부가 1만 명의 시간제 공무원을 뽑겠다고 했다. 문제는 이런 흐름이 민간 기업까지 파급될 수 있느냐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근로 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삭감에 반발할 게 분명하다. 독일·네덜란드처럼 이들을 설득해 양보를 얻어내지 못하면 결국 비정규직만 양산하게 된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민노총을 포함한 새로운 노·사·정 합의가 필요하다. 정부는 고용률 70%의 목표보다 대기업 정규직의 마음을 얻는 게 중요하다. 고통 분담 없이는 경제 위기를 넘기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