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의 세상탐사] 망신살 뻗친 폴슨의 이유 있는 고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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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호 31면

요즘 경제계에서 망신살이 뻗친 사람은 미국의 존 폴슨(57)이다.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주택시장에도 버블이 올 것’이라며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예견해 큰 돈을 번 헤지펀드계의 대부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폴슨이 이번에는 향후 금값 상승을 확신하고 베팅을 거듭하다 쪽박을 찰 지경이다. 그의 펀드가 반 토막(47%)이 났기 때문이다. 최근 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SALT 헤지펀드 콘퍼런스’에 모습을 드러냈다. 낯 뜨거웠던지 기자들에게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변명했지만 일부 내용이 공개돼 돌아다닌다.

 “지금은 금으로 심각한 손해를 봤지만 꾹 참고 더 견뎌내면 된다. 인플레이션이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금을 사두는 것만이 최선의 대비책이다. 전 세계에서 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돈이 풀려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오는 시기를 내가 조금 성급하게 봤을 뿐이다.”

 폴슨이 금 투자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그의 논리적 근거가 터무니없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유럽·일본 등 어느 나라라고 꼬집을 것도 없이 세계 각국은 돈을 풀어 경제를 살리는 양적 완화 정책을 쓰고 있다. 요즘의 세계경제 키워드가 바로 ‘양적 완화’인 셈이다. 미국만 보더라도 시장에 푼 통화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본 통화 공급량을 알려주는 지표인 M1의 규모는 2000년대 초 1조 달러대였다. 그런데도 유동성이 넘쳐나 주식·부동산 양대 자산시장의 과열로 이어졌다. 마침내 정보기술(IT) 버블, 부동산 버블 등이 터지면서 세계 경제가 잇따라 홍역을 치렀다. 공교롭게도 10년 뒤인 2010년 초 M1이 당시의 두 배인 2조 달러대에 이르렀다. 경제 규모가 커졌다고는 해도 최근 통화공급이 급격히 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M1은 지난달 기준 2조5000억 달러에 달한다. 머지않아 2000년대 중반처럼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 등에서 양적 완화의 부작용인 경기과열 현상이 생길 것이라는 성급한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지수가 연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며 사상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시중에 넘쳐나는 돈이 주식시장으로 먼저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벤 버냉키 의장이 ‘돈을 푸는 것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뉘앙스만 풍겨도 시장은 화들짝 놀라 요동치기 일쑤다.

 비관론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까지도 “양적 완화 정책이 끝날 것으로 전망되는 향후 1~2년은 버냉키 의장의 말 한마디에 급등락하겠지만 어쨌든 주식시장은 유동성이 풍부해 상승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똑같은 근거로 시장 전문가인 스티브 아이즈먼도 ‘주택·건설 관련주를 볼 때’라고 투자 조언을 한다. 과거와 같이 주택 버블이 또 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미국과 정책 동조를 하고 있는 유럽시장도 활기야 덜하지만 이와 다를 바 없다.

 일본도 인쇄기로 엔화를 찍어내겠다는 아베노믹스로 인해 사정이 비슷하다. 심지어 아베노믹스 부작용을 우려해 지난 주말에는 주식시장이 느닷없이 폭락하는 장세를 연출했다. 일본은행의 국채금리 변동으로 23일 주식시장이 급락한 것이다. 다음 날인 24일 정부가 무려 4조 엔을 투입하면서 시장 개입에 나선 뒤엔 장중 3%대의 급등락 현상을 보였다. 서드포인트 파트너스 최고경영자(CEO)인 대니얼 로브는 “일본의 양적 완화로 달러당 100엔을 넘어선 건 향후 일본에서 큰 장이 선다는 뜻으로 봐도 된다”고 말할 정도다. 일본 시장에서 경기과열 현상이 곧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북핵 리스크 등으로 한국 시장은 세계경제 흐름과 동떨어진 듯하게 갈지 모르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예외일 수 없다. 길 잃은 돈이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이런 돈은 어떤 계기만 되면 주식시장이든, 부동산 시장이든, 창업시장이든 한꺼번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요즘 미국 경제전문가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농담이 있다.
 “버냉키 의장 후임으로 누가 좋을까.”
 “밀턴 프리드먼.(양적 완화를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
 “그는 죽었다.(인플레이션 위험을 끝내야 한다는 의미)”

 어쨌든 최근 논쟁거리인 ‘양적 완화와 인플레이션’을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할 때다. 지킬 재산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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