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지슬''남영동', 그리고 '코리아 판타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
베를린 자유대 초빙교수

5월 2일부터 12일까지 베를린에서는 ‘한국 영화의 오늘’이라는 주제로 한국 영화에 대한 연속 상영이 있었다. 13일에는 한·독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국립무용단의 ‘코리아 판타지’ 공연이 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은 ‘충격적’ ‘환상적’이라는 말로 집약됐다.

 ‘한국 영화의 오늘’ 행사의 개막작품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지슬’이었고, 두 번째 작품은 김근태 고문사건을 다룬 ‘남영동 1985’였다. 국제적·국내적으로 크게 주목받은 두 편 모두 역사성과 사회성이 짙은 영화로서 집단학살과 인권유린을 주제로 건국 전후와 전두환 독재 시기를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들이었다. 과거 같으면 해외 상영은 고사하고 제작 자체가 불가능한 주제들이었다.

 그 점에서 현대 한국의 아픔과 어둠을 직시한 영화가 정부와 문화 영역의 주요 기관들이 공동 주최한 공식 해외 행사에서 상영될 수 있다는 것은 크게 시사적이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성숙을 반영하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금기시되며 혹독한 억압을 받아온 제주 4·3의 집단학살 문제는, 진상 규명을 위한 정부기구 설치를 포함해 제주와 한국 사회 내부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인들과의 문화적 공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군부독재 시기의 참혹한 고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남영동 1985’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탄압받던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지난 한 세대의 한국 사회의 역사 발전과 문화 변동에 대해 일정한 자부를 느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세계적인 한류 열풍이 한국의 민주화 이후라는 점은 자율과 창의에 바탕한 자기성찰 없는 문화 발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개인이건 국가건 인간들은 누구나 자기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나,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 만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즉 우리가 과거 아픔을 성찰한 문화를 세계에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은 미래 발전과 희망의 징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과거 직시와 자기성찰의 크기는 곧 희망과 가능성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환부를 치료하지 않는다면 전체 몸은 결코 건강해질 수 없다. 우리가 ‘밖으로’ 보여주고 소통할 수 있는 정도는, 스스로 ‘안에서’ 드러내고 극복한 건강성만큼이라는 점이다.

 특별히 오늘날 동아시아의 과거사·교과서·영토·성노예·침략 문제를 둘러싼 진실과 화해가 근저부터 도전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가 자기 치부를 직시한다는 것은 동아시아(사)적이며 세계(사)적인 의미를 함께 갖는다. 아직 크게 부족하지만 동아시아에서 한국만큼 민간학살과 독재와 인권유린을 포함한 자기 역사를 반성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일본·중국·북한·대만을 포함해 세계를 향해 우리가 더 큰 시야에서 이 길을 멈춤 없이 앞서 나가야 하는 세계적 동아시아적 이유인 것이다.

 태평무·강강술래·학춤·부채춤·봉산탈춤·삼고무·오고무 등을 공연한 ‘코리아 판타지’를 보며 옆의 관객들은 ‘환상적’ ‘절대적’이라는 말을 연방 반복했다. 이 공연은, 모든 예술은 토착적일수록 보편적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인간의 마음을 깊이 움직일 수 있다면 언어와 장소는 문제되지 않는다. 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절대감동은 모두를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다.

 토착(성)은 곧 나날의 일상 삶을 말한다. 보편적 예술은 그로부터 나온다. 이 공연은 춤이 곧 삶이고 노래가 곧 삶이었던, 사시사철 어디서나 함께 흥얼거리고 덩실거리며 살았던, 그리하여 삶과 예술, 놀이와 일, 나와 남, 자연과 인간이 일치되었던 한국적 삶의 방식과 예술 양식의 아름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즉 한국 문화의 정수였던 일로서의 놀이와 놀이로서의 일, 삶으로서의 예술과 예술로서의 삶을 함께 보여주고 있었다. 우린 그것을 다시 복원할 수 있을까? ‘코리아 판타지’는 오늘날 황폐화되고 고통스러운 한국적 삶이, 일과 놀이, 삶과 예술의 분리로부터 왔다는 점을 무겁게 깨닫게 하고 있었다.

 한류 열풍은 이제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의 한국·한국어·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학습으로까지 넓어지고 있다. 지금 한국의 문화 영토는 유사 이래 가장 넓다. 그러나 그럴수록 토착적 구체성과 보편적 세계성, 문화와 삶이 유리돼선 결코 안 된다. 우리는 어떻게 나날의 한국적 삶의 행복과 미학을 복원하여 그것이 세계적 삶의 보편성과 함께 간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한국 사회가 좀 더 인간적이며 문화적이고,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를 더욱 내면화해야 하는 소이이다.

박 명 림 연세대 교수·베를린 자유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