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61) 짧기만 했던 80년 서울의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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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24일 오전 8시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오른쪽)이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 추기경은 “화해와 단결을 위해 구속 인사들을 가급적 빨리 석방해달라”고 부탁했고, 최 대행은 “국민적 화합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되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중앙포토]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새로운 구상을 내놨다. 각계 원로가 참여하는 국정자문회의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실무는 청와대 정무수석인 내가 맡았다. 헌법개정심의위원회와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 허정 전 과도내각수반, 이재형 전 의원 등을 직접 찾아가 국정자문위원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1979년 12월 말 서울 명동성당 주교관에 가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가톨릭의 국정자문회의 참여를 부탁했다. “국정 상황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설명에 김 추기경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나의 요청을 들어줬다. 가톨릭이 국정에 참여한 첫 사례다. 그러면서 김 추기경은 말을 꺼냈다.

 “고 지사, 부탁이 하나 있어요. 자문회의에 참여하는 조건은 아니고….”

 김 추기경과는 전남도지사로 일할 때 인연을 맺었다. 그는 나를 고 지사라고 불렀다.

 “이번에 김대중씨를 좀 복권시켜주세요.”

 “…. 김대중씨는 선동적인 정치가로 인식돼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이때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오. 내가 지난주 미사 때 김대중씨를 만났는데 이제 많이 원숙해졌어요.”

 김 추기경은 ‘원숙’이란 표현을 썼다. 그의 진지한 요청에 어떻게 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제 선에서 다룰 일은 아닙니다. 최규하 대통령께 그렇게 전해 드리겠습니다.”

 청와대로 돌아가 최 대통령에게 김 추기경이 가톨릭의 국정자문회의 참여를 승낙했다는 보고를 했다. 그리고 말했다.

 “김 추기경께서 김대중씨의 복권을 부탁했습니다.”

 “음….”

 최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사무실로 돌아와 3대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에 김대중씨의 복권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 2~3일 후 3곳에서 보고서가 올라왔다. 복권의 장단점을 분석해 적었을 뿐 결론이 없었다. ‘아무도 책임지기 싫다는 얘기구나. 결국 내가 결정을 내려야겠구나.’ 고민이 시작됐다.

 그때 청와대를 출입하는 성병욱 중앙일보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던 류근일씨의 복권을 부탁했다. 그와 얽힌 옛 기억이 떠올랐다.

 57년 12월 서울대 문리대에서 필화 사건이 일어났다. 정치학과 학생 류근일이 학보 『우리의 구상』에 쓴 ‘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로의 지향’이란 논문이 문제가 됐다. 국가체제를 부정한다는 혐의를 받았고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였다. 문리대 서클 ‘신진회’가 배후로 몰렸다.

 신진회는 영국 노동당의 사회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순수 이념 연구 서클이었다. 지금 동아리의 원조쯤 되겠다. 회장은 4학년생인 김지주였고 나와 류근일·한영환·최서영 등 15~16명이 활동했다. 류근일을 신진회에 가입하도록 추천한 사람은 나였다.

 김지주와 류근일이 구속됐다. 수사의 칼날이 나에게도 향했다.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나에게서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경찰서에 찾아와 보증을 섰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너 류근일이 아버지가 누군지 아냐. 류응호 교수다.”

 류 교수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대 문리대 교수를 지냈다. 월북해 김일성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58년 4월 법원은 신진회를 순수한 학술단체라고 규정했고 류근일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는 다른 공안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80년 2월 28일 검찰의 한 국장이 복권 대상 명단을 내 사무실로 가지고 왔다. 김대중·류근일씨의 이름은 없었다. 내가 두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도록 했다. 복권 명단 서류를 들고 최 대통령의 집무실로 갔다. 김대중씨의 이름을 넣었다는 보고를 했다. 아무 말 없이 최 대통령은 서류에 결재를 했다.

 2월 29일 김대중·류근일씨를 포함해 687명이 복권됐다. 23명 사회 각계 원로가 참여하는 국정자문회의가 출범했다. 헌법개정심의위원회도 기대 속에 출발했다. 서울의 봄이었다. 하지만 봄날은 너무도 짧았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인물] 김수환 추기경

김수환(스테파노·1922~2009)=1951년 사제품을 받았고 68년 대주교로 승품했다. 69년 한국인 최초이자 당시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에 서임됐다. 70~80년대 독재정권에 반대하며 민주화에 기여했다. 87년 6·10 민주항쟁 때 명동성당에 모인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던 공안 관계자에게 “나를 밟고 넘어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9년 2월 16일 선종(善終·서거를 의미하는 천주교 용어)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은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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