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과거사 말장난 릴레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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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리나라(일본)는 한때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 그런 인식은 갖고 있다.”

 8일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의 발언이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도 전날(7일) 똑같은 발언을 했다. 각료들이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말을 맞추고 있다. 겉보기에는 ‘반성 모드’로 전환한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일각에선 “‘침략의 정의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아베 총리의 발언에 미국이 강하게 반발하자 작전상 후퇴한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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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실체는 다르다.

 일 정부 관계자는 “아베 정권 각료들의 최근 발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성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제로는 아베 정권이 전후 70년을 맞는 2015년을 목표로 내놓으려 하는 ‘아베 담화’의 방향성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즉 아베의 발언은 겉보기에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지만 위장술이란 지적이다. 담화의 가장 핵심 부분인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란 부분을 교묘하게 빼고 발언하고 있다. 실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는 것이냐”는 기자들 질문에 대한 최근의 답을 유심히 분석해 보면 항상 두 표현은 쏙 빼고 “아베 정권도 누차 그런 정신을 계승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비켜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베가 8일 국회에서 “유엔총회가 74년에 침략의 정의를 결의했다고 하지만 안보리가 최종 판단하지 않았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까지 ‘침략’이란 단어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 정부 관계자는 “아베 총리는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역대 정권이 계승해 온 무라야마 담화의 역사인식을 대전환한다는 방향성을 이미 굳힌 상태”라고 전했다.

 즉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 “반성과 사죄를 표한다”는 기본 입장은 유지하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란 단어를 빼면서 “향후 미래를 향해 아시아 제국들과 우호관계를 구축한다”는 내용을 ‘아베 담화’에 추가로 담겠다는 주장이다.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자학사관이며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일본회의(日本會議) 등 보수·우익세력을 의식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아베의 이 같은 방침은 한국과 중국, 나아가 미국의 강한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아베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부정하게 되면 단순히 자국이 발표한 담화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서명한 양국 간의 ‘한·일 공동선언’까지 전면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양국 정상은 공동선언 제2항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고 명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을 규정한 도쿄재판의 결과를 사실상 뒤집어엎는 셈이 된다. 아베는 이날 사민당 야마구치 도쿠신(山口德信) 의원으로부터 “일본의 히틀러가 돼선 곤란하다”는 야유까지 받았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이날 “아베 정권은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는 대신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는 일·한 관계 악화를 우려해 당분간 유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홋카이도(北海道)신문은 “여론의 높은 지지가 2015년까지 간다는 보장은 없다”며 “아베는 국내 정세와 아시아 외교를 지켜보면서 결국 힘든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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