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여성 임원이 70% … "애 낳으면 나가는 후배들아, 길게 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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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이 회사, 수상하다. “상무님!” 하고 부르면 열 번 중 일곱 번은 여자가 돌아본다. 글로벌 제약회사의 국내 법인인 한국MSD 얘기다. 임직원 640여 명 중 절반가량(303명)이 여성인 것은 물론, 13명의 임원 가운데 9명이 여자다. 남자가 비주류인 ‘수상한’ 곳이다. ‘제약업계의 꽃’이랄 수 있는 영업 조직 4개를 이끄는 리더가 모두 여자다. 이 정도면 굳이 성별의 차이를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런 수상한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 임원 4인방을 7일 서울 마포 한국MSD 사무실에서 만났다. 회사에서는 주류이지만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이라는 편견에 상처받는 그들의 애환을 지상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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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애희=전에 다녔던 직장이 보험회사다. 정보기술(IT) 업무를 총괄했는데, 아줌마가 보험회사 다닌다고 하니까 다들 ‘보험 아줌마’만 떠올리더라. 그런데 남편이 의사라고 하면 ‘먹고살 만한데 뭐하러 바깥일 하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애도 셋이다. 여성 인력에 대한 회사의 제도적·문화적 배려가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기 어려웠을 거다.

 ◆김소은=여자가 임원 되기 어려운 데는 분명 사회적인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지만 여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내가 얼마나 자신의 커리어를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어려움이 닥치면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주저앉는 경우를 많이 봤다. 여성 스스로 한계를 짓고 ‘여자니까 안 돼’하는 식으로 지레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스로가 만든 ‘유리 천장(glass ceiling)’이랄까. 예전엔 내 미래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만한 여자 선배 ‘롤 모델’이 없으니 중도 탈락하는 게 당연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롤 모델이 많으니 자신의 능력을 한계 짓지 말았으면 한다.

 ◆권선희=출산하고 나면 계산기를 두드리게 된다. 두드리면 결과는 뻔하다. 애는 생판 모르는 남한테 맡기고 회사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데, 월급이 나오면 고스란히 (아이 봐주는) 아줌마에게 직행한다. ‘차라리 그만두자’ 하고 결론내기 쉽다. 그렇지만 길게 봐라. 그걸 견디고 지금 임원이 돼서 받는 월급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김=‘퀄리티 타임’이라고 하지 않나.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보다 길지 않은 시간이라 해도 더 알차고 더 끈끈하게 자식과 정을 나누면 된다. 절대적인 시간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회사에서 배운 소통의 기술, 리더십 등을 아이에게 활용하면 애한테는 더 도움이 된다.

 ◆이=큰아들이 어렸을 적 일이다. 아침에 직장을 나가는데 애가 ‘엄마, 가지마’ 하면서 목놓아 울었다. 일단 출근했는데, 회사 현관문을 열고 차마 들어갈 수가 없더라. 다시 집으로 갔다. 그랬더니 애는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 울었느냐 싶게 아줌마랑 방긋방긋 웃으면서 놀고 있더라. 아이도 엄마랑 헤어지는 순간에는 마음이 아파 감정을 그렇게 표현하는 거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싹 잊어버린다.

 ◆곽훈희=16개월 된 애기가 있다. 주중 밀린 엄마 노릇을 보상이라도 하듯 주말에 애랑 붙어 있으면 어느 순간 애한테 짜증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루 종일보다 한두 시간 ‘퀄리티 타임’을 갖는 게 애한테도 더 좋은 것 같다. 조기퇴근제(1세 미만의 유아가 있는 여직원은 1시간 단축 근무)나 탄력근무제(오전 7~10시 자율 출근, 1일 근무 8시간에 맞춰서 퇴근)를 활용해 유대감을 높이고 있다.

 ◆권=이런 제도야 국내 기업들에도 문서상으로는 잘 돼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걸 실제로 쓰느냐 마느냐인데, 그건 기업의 문화다. 일부에서는 생리휴가를 내도 ‘왜 휴가를 냈느냐’고 물어보는 곳까지 있다. 이런 곳에서는 여성 인력을 위한 제도가 있어도 사문화되기 쉽다.

 ◆이=그런 것까지 일일이 배려해야 하니 여자 쓰는 게 꺼려진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회사가 많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뛰어난 여성 인력이 있는데, 그 친구들을 배려하는 회사라면 그 뛰어난 인재들이 그 회사로 몰릴 수밖에 없다. 회사로서도 이익이다.

 ◆곽=영업사원 경력직 뽑을 때, 다른 국내 제약사에서 실적이 뛰어난 여성 직원이 결혼을 앞두고 우리 회사에 지원했다. 그 친구 말이 여자 선배들을 보면 결혼하고 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른 기회를 찾은 건데, 우리로서야 좋은 인재를 찾은 거다. 지금 내 밑에 영업팀이 8명 있는데, 이 중 3명이 출산휴가를 갔다. 당장이야 팀 돌아가는데 삐걱거리지만, 이렇게 지원을 해줘야 인재를 키울 수 있다.

 ◆이=아직은 워킹맘이 살기 힘든 세상이다. 서울 강남에 사는데 그곳 전업주부들의 아이 학업에 대한 관심이 여간 아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직장 다닐 수 없다. 나는 애들이 원하지 않는 사교육은 시키지 않겠다는 철학을 세웠다. 한 번은 아는 학부모가 전화해서 ‘과외 자리 하나 났는데 끼워주겠다’고 선심 쓰듯 얘기하는데 내가 싫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를 외계인 보듯 하더라. 첫째 애는 초등학교 전교 회장을 했는데 그때 한 번도 학교에 찾아가지 않았다. ‘네가 회장이지 엄마가 회장은 아니다’라고 단단히 타일렀다. 처음에야 섭섭해했지만 나중에 졸업할 때 돼서는 자기는 혼자서 회장 역할을 했다고 자랑스러워하더라.

 ◆권=육아에 가족의 도움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나는 시어머니부터 어머니, 시누이 도움까지 받았다. 궁하면 통하게 돼 있다. 그리고 워킹맘이라면 내려놓을 건 내려놔야 한다. 남편 직장 때문에 대전 지사로 옮겨 일한 적이 있었다. 60대 어르신을 도우미로 썼는데, 일찍 퇴근하고 와서 보니 이 분이 애 입을 행주로 닦고 있더라. 깜짝 놀라 ‘왜 애 입을 행주로 닦느냐’고 물었더니 그분 답이 참…. 애 입이 뭐가 더럽냐고. 나는 행주가 지저분하다고 얘기한 건데, 그분은 애 입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한 거다. 그런 거 못 견뎠으면 직장 그만뒀어야지. 애들은 적당히 지저분해도 건강에 크게 문제 없고, 오히려 면역력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곽=내 인생에 남편이 필요하랴 싶었는데, 38세에 결혼했다. 애는 마흔두 살에 낳았다. 초고위험 산모였지. 2010년에 상무 달았으니까 임원 되고 애 낳은 최초 사례일 거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배려의 문화가 있다 보니 나도 애 가질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심재우·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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