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시위는 '사회적 대화'라는 미국 … '투쟁'이라는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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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별
사회부문 기자

미국 워싱턴DC는 작은 도시다. 서울과 비교해 면적은 약 26%, 상주 인구는 약 6%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한 해 평균 1000~1500건의 집회·시위가 열린다. 그 대부분이 4개 지구 가운데 백악관과 의회, 연방정부 건물이 몰려 있는 북서 지구에서 발생한다. 이 지역에서 집회·시위는 일상의 풍경이다.

 기자는 지난달 21일부터 사흘간 이곳에 머물며 집회·시위 4건을 목격했다. 일부는 허가 받은 합법집회였고 일부는 아니었다. 이슈도 외교 문제부터 환경·장애인 대책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시위 분위기는 한국과 여러모로 달랐다.

현지 경찰은 무허가 집회·시위라고 무조건 막지 않았다. 시위가 과격하게 흐를 우려가 있을 때만 나섰다. 경비 책임자인 스티븐 선드 경무관은 “(국민의 평화로운 집회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따라…”란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선’을 넘지 않았다. 시위 때도 보행자·차량 통행을 완전히 막지 않았고,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확성기를 틀지도 않았다. 일부 시위대가 과격행동으로 체포될 때도 우리와 같은 ‘격렬한’ 저항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악관 코앞에서 32년간 천막 농성을 하면서도 법을 지키려 한 번도 누워 잔 적이 없다는 할머니 얘기는 기자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궁금증은 시위대와 얘기를 나누면서 풀렸다. 그들은 시위를 ‘사회적 대화’의 수단으로 여겼다. 시위 대상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뒀다. 그래서 법을 지켰고, 다른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행동을 삼갔다. 정당한 집회 와 폭동 을 구분하는 경찰의 법 집행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최근 국내에서 집회와 시위가 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다양한 의사 표출이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는 증거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 달리 경찰도 집회·시위를 무조건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시위를 ‘대화’가 아닌 ‘투쟁’으로 바라보는 문화다. 아직도 많은 시위대가 확성기를 사용해 ‘싸움’을 독려한다. 통행인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공장소를 독점하며 ‘힘 자랑’을 한다. 공권력에 대한 저항을 당연시하는 풍조도 여전하다. 의식이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종의 ‘문화 지체’다. 이제 시위 문화를 바꿔야 한다. 필요하다면 확성기 사용 허가제 도입 등 법·제도 개선도 검토해야 한다. 과거에 사로잡힌 시위 문화를 바꾸지 못하면 그간 민주화로 얻은 성과마저 희석될지 모른다. 백악관 앞 천막농성 할머니에게 배워야 할 점은 ‘평화에 대한 열망’만이 아니다.

김한별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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