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다른 인생 무대선 '세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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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공통점이 없어요.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섯살씩 건너뛰고, 그렇다고 취향이 비슷한가…. 그런데 우리가 친구가 됐어요. 비록 무대 위에서지만."

겁없이 무대에 뛰어든 사내 두명이 있다. 연극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완전 신인이다. 대사 외기도 벅찬데 연출자는 "잘 한다, 잘 한다"며 군말이 없다. 옆 사람의 대화를 엿듣 듯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이 연극에서 이들의 '무경험'이 점수를 땄다나? 영화배우 백종학(40)씨와 변호사 홍승기(45)씨는 그렇게 늦깎이 데뷔를 했다. 지난 1일부터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 오른 연극 '아트'가 바로 그 무대다.

백종학씨는 본래 영화로 잘 알려진 얼굴. '강원도의 힘'에서 30대 초반 대학강사로 나와 주목받았고 이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봄날은 간다'에도 간간이 얼굴을 비췄다.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어요. 기초부터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 아닌가요. 그런데 기회가 오더군요. 연출자는 낯선 얼굴을 찾고 싶었나 봐요. 제가 '강원도의 힘'에 캐스팅될 때처럼 연극에도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됐네요."

'아트'는 그림 한 점을 놓고 세 친구가 티격태격 벌이는 말싸움을 그렸다. 1996년 배우이자 제작자인 숀 코너리가 영국 무대에 올려 각종 상을 휩쓸었고 98년엔 토니상 최우수 연극상을 수상했다.

'아트'는 1시간30분 동안 쉴 새 없이 대사를 내뱉기 때문에 배우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대사 외기는 쉬운 편이죠. 남들 앞에서 뭔가를 말하고 읽는 게 체질화됐으니까요. 하지만 연기라는 건 끝이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요." 다른 배우들이 이구동성으로 대사가 많다고 푸념하자 홍승기 변호사는 손사래를 친다. 무대에 선 뒤로는 부담감 때문에 밤잠도 사라졌다.

예술 관련 저작권 분쟁을 전문으로 하는 그는 변호사협회지에 법정 영화를 분석하는 글을 올리는 등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다. 얼마 전엔 '자산관리는 플랜마스터에게 맡기시고…'라는 내용의 광고 모델로 TV 전파를 타기도 했다. 연극무대로 외도를 한 것도 그저 "재밌을 거 같아서"였다.

이 중고 신인들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건 배우 박희순(35)씨의 몫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종학과 승기가 싸울 때마다 이를 말리는 해결사로 나온다.

"성격상 단순하고 반복적인 걸 싫어해요. 그런데 연극은 다르더군요. 반복의 연속인데도 무대에 오를 때마다 새롭네요."(백종학)

"공연이 빨리 끝났으면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에요. 그런데 석달 후쯤엔 이 무대가 그리워지겠죠. 이걸 애증이라고 해야 하나."(홍승기)

"연극은 마약과 같아요. 관객들이 울고 웃는 걸 직접 몸으로 느끼다 보면 이 무대를 떠날 수 없거든요." 올해로 연극배우 12년차인 '선배님' 박희순의 말에 백종학과 홍승기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무대에 선 후로 그 이치를 조금씩 체득하는 듯했다. 오는 23일까지. 02-516-1501.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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