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 울먹인 88세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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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임을 수락한 조르조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로마 퀴리날레 성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로마 로이터=뉴시스]

“28세에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제가….” 목이 멘 연설이 중단됐다.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는지 손수건이 들어 있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이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연설이 끝나자 900여 명의 상·하원 의원이 일제히 숙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조르조 나폴리타노(88) 이탈리아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하원의 연단에 섰다. 이틀 전 의회가 자신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한 데 따른 연설이었다. 1925년생인 미수(米壽)의 대통령은 노령을 이유로 정치권의 연임 권유를 물리치다 의회가 다섯 차례의 투표에도 불구하고 새 대통령을 뽑지 못하자 단임 의사를 철회했다. 다음 투표에서 그는 1005명의 선거인단에서 738표를 받아 새로 7년의 임기를 얻었다.

 로이터통신의 연설 영상에 따르면 그는 시종일관 절박하게 정치권에 반성과 개혁을 촉구했다. “우리에겐 더 이상 개혁의 의무를 방치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말을 하는 도중에 손수건을 꺼내 눈시울을 닦았다. 그는 “내가 다시 전처럼 우이독경과 같은 상황을 겪게 되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국가 위기 사태를 외면하고 각자의 주장만 고집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나폴리타노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총선 뒤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각 정파의 대표를 한자리에 불러 대화와 타협을 당부했 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탈리아는 마리오 몬티 총리가 이끄는 과도정부로 지탱하고 있다. 집권세력이 없는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식물 국회’ 상태다. 하원에서는 사회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으나 상원에서는 사회당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자유국민당, 코미디언 출신 베페 그릴로가 만든 사회단체인 오성운동이 의석을 분점해 과반 세력이 없다. 연립정부 구성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정파들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덩치만 믿고 위험을 방치하다 침몰한 타이타닉호와 같은 운명에 처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론까지 대두됐다. 이탈리아 경제는 계속 위축되고 있고, 의회는 재정긴축안을 통과시키지 못해 머지않아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도 있다.

 나폴리타노 대통령의 연임 결정 이후 이탈리아 국채 금리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정파를 초월한 지지를 받고 있는 그가 위기의 돌파구를 마련할지 모른다는 국제사회의 기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3~1945년 당시 나치 독일이 세웠던 북이탈리아 괴뢰정부에 대항했던 레지스탕스이자 10선 의원 출신인 노(老)대통령은 곧 다시 당 대표들을 만나 정부 구성을 위한 양보를 부탁할 계획이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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