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字, 세상을 말하다] 黔驢技窮 [검려기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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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일이란 게 참 희한해 잘나갈 때보다는 어려울 때 더 좋은 작품이 나오곤 한다. 당(唐)대의 문장가 유종원(柳宗元)도 예외는 아니다. 20세에 진사가 돼 벼슬길에 올랐지만 관운(官運)은 좋지 못했다. 수구파의 배척을 받아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지방을 전전하다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과는 이별했다.

그는 시(詩)와 산문(散文) 모두에 매우 능했는데 특히 그가 영주(永州)로 좌천됐을 때 쓴 우언(寓言) 작품 ‘삼계(三戒)’는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그는 삼계에서 큰 사슴(?)과 당나귀(驢), 쥐(鼠) 등 세 마리의 동물을 예로 들어 자신의 실력보다는 특수한 세력을 등에 업고 포악한 짓을 저지르는 이들을 풍자하고 있다. 황제의 총애를 얻으려 발버둥치는 관리와 문인의 나약함을 꼬집고 있기도 하다. 그중 당나귀를 다룬 게 ‘검지려(黔之驢)’다. 검(黔)은 중국 귀주(貴州)성의 별칭이며, 려(驢)는 나귀로 ‘귀주의 당나귀’로 해석할 수 있다.

옛날 귀주에는 당나귀가 없었다. 한데 호기심 많은 한 사람이 당나귀 한 마리를 귀주로 들여왔다. 그러나 특별히 쓸 일이 없어 산 아래에 풀어 놓고 키웠다. 하루는 호랑이가 이 당나귀를 보고 놀랐다. 과거에 본 적이 없는 데다 몸집이 자신보다 컸기 때문이다. 신수(神獸)라 생각하고 한동안 동정을 살폈다. 그러다 한 번은 가까이 접근했는데 당나귀가 소리 높여 우는 바람에 크게 놀라 도망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며칠을 살펴도 당나귀에게선 별다른 재주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용기를 내 다가서자 당나귀는 호랑이에게 뒷발질인지 헛발질인지를 할 뿐 다른 기량이 없었다. 당나귀의 재주를 다 파악한 호랑이는 그때야 덤벼들어 순식간에 잡아먹고 말았다. 여기서 ‘귀주에 사는 당나귀의 재주’라는 뜻의 ‘검려지기(黔驢之技)’라는 성어가 나왔다. 보잘것없는 기량을 들켜 비웃음을 산다는 말이다.

기술이나 기능이 졸렬함을 비유할 때 또는 자신의 하찮은 재주를 믿고 우쭐대다가 창피를 당하거나 화(禍)를 자초할 때 쓴다. 또 쥐꼬리만 한 재주마저 바닥이 난 것을 비유해 ‘검려기궁(黔驢技窮)’이라 말하기도 한다. 북한이 연일 미사일과 핵을 갖고 재주를 부리고 있다. 그 재주 다 부리고 나면 어떻게 될까.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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