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프로그램의 소금' 네티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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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송사나 제작부서 사무실의 아침 풍경은 늘 비슷하다. 책상 위엔 두 종류의 문서가 놓여 있다. 하나는 간밤의 시청률표, 또 하나는 방송 관련 기사를 모은 클리핑 뉴스다.

언제부턴가 여기에 또 하나의 문서가 추가되었다. 바로 인터넷 게시판에 뜬 네티즌 의견들이다. 전부는 아니고 그중에 의미 있는 발언들이 중요한 회의자료가 된다.

실상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제작진이지만 없애는 건 시청자다. 가장 영향을 미치는 건 물론 시청률이지만 네티즌 의견도 프로그램 '살생부' 작성에 큰 역할을 한다.

최근 SBS의 '러브 투나잇'과 '깜짝 스토리랜드'의 조기종영 소식도 그 범주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인터넷 게시판이 때로는 팬클럽이 되는 일도 있다. MBC 미니시리즈 '네 멋대로 해라'가 방송될 때 프로그램 게시판은 찬사로 일색이었다. 시청률과 관계없이 제작진은 신명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프로를 위해선 팬클럽(설탕)도 좋지만 이왕이면 헬스클럽(소금)의 기능을 갖는 게 나을 성싶다. 방송도 인간도 고지혈.고혈당은 위험하다. 미리미리 사전에 주의보.경보를 발하는 건 네티즌의 신성한 임무다. 지난 주말 벌어진 사상 초유의 인터넷 마비 소동은 정보기술(IT) 강국의 체면만 손상한 게 아니다. 인터넷이 다운되면 삶의 질도 다운된다는 걸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민주주의를 눈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세상인데 그게 '먹통'이 되니 '소통'을 꿈꾸던 많은 네티즌들이 '분통'을 터뜨린 건 당연한 일이다.

인터넷게시판에는 새콤달콤한 찬사도 있지만 쓰고 짜고 매운 꾸지람도 수두룩하다. 건강한 혀는 쓴맛, 신맛, 짠맛, 단맛을 골고루 느낄 수 있어야 하듯이 게시판의 의견도 다양해야만 건강한 방송을 기약할 수 있다.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네티즌들은 두려움 없이, 그리고 줄기차게 발언한다. 개중에는 메아리를 기대하는 충언도 있고 일회성 심심풀이 내지는 화풀이성도 더러 있다.

의미 있는 발언목록에 끼여 마침내 방송을 바꾸고 싶다면 말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하기 방식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대뜸 욕부터 하기보다는 차분하게 예의를 갖춰 조목조목 지적하고 제시하는 게 훨씬 영향력이 크다. 욕설은 반성을 가져오지 못하고 반발만 가져올 뿐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보다는 차라리 거친 말이 낫다).

지금 텔레비전 식단의 음식들은 너무 달아서(닳아서?) 문제다. 누가 소금을 좀 뿌려야 하는데 그 역할의 일부를 네티즌이 맡아 주어야 한다.

제작진이 주목하는 네티즌의 발언은 대체로 4(네)제(提)의 영토에 속해 있다. 문제를 제기(提起)하고 정보를 제보(提報)하고 방향을 제시(提示)하고 아이디어를 제안(提案)하는 네티즌, 그들이야말로 반갑고 고맙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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