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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주세요” 가수 장기하의 이색 실험 … 빚지고 못 사는 한국인에 통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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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강일구]

‘공짜 점심은 없다’. 경제 격언 중 이보다 유명한 말이 또 있을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즐겨 쓰면서 경제학자는 물론 일반에도 익숙해졌다. 실생활에서도 널렸다. 백화점 시식 코너에서 집어 주는 햄 한 조각, 사과 한쪽 어느 것 하나 진짜 공짜는 없다. 먹고 나면 괜히 미안해진다. 은혜를 입거나 빚을 진 느낌이 든다. 왠지 하나 사줘야 할 것 같다. 방문판매 회사들은 이런 심리를 진작 마케팅 전술로 활용해 왔다. 햄 한 조각 비용은 결국 제품 가격에 얹어진다. 경제학자들이 하도 오랫동안 이런 진실을 파헤쳐 놓은 통에 이젠 소비자도 공짜의 진실을 다 안다. ‘어떤 경제 체제도, 어떤 상품도 공짜 시스템으로 굴러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 오래된 격언을 록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시험대에 올렸다. 무대는 ‘공짜 점심은 있다’고 믿는 인터넷 음원 시장. 신곡을 내면서 가격을 소비자가 정하도록 했다. 이름하여 ‘솔직하게 내고 가져갑시다:백지수표 프로젝트’. 지난달 29일 신곡 ‘좋다 말았네’를 디지털 음원으로 내놓고, 장기하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노랠 들어보고 아 이거 좋다 필이 온다 싶으면은 뭐 만원도 좋고 백만원도 좋고…. 좋긴 좋은데 주머니 사정이 좀 그래 그러면 알아서 가져가시라’고. 이유를 물어봤다. 장기하 측은 “음원의 주인공(저작권자)에게 수익을 돌려주자는 취지”라고 했다. 이렇게 들어온 돈은 음반사와 나눌 필요가 없다. 한국 음원시장에서 창작자의 몫은 채 10%가 못 된다. 왜곡된 유통구조 탓이다. 이런 부조리를 바로 잡겠다는 얘기다.

 ‘알아서 주세요’의 원조는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다. 2007년 10월 10일 새 앨범 ‘인 레인보스(In Rainbows)’를 공개하면서 소비자가 가격을 정하게 했다. 한 달간 100만 명이 평균 2.26달러를 냈다. 약 40%가 돈을 냈다. 라디오헤드는 과거 두 개의 앨범을 판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인터넷 시장이 떠들썩했다. ‘창작·정보의 가격이 공짜라고 믿는 인터넷 세상을 바꿀 대안이 등장했다’며 환호했다. 하지만 잠시였다. 다른 밴드들이 따라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공짜 다운로드가 훨씬 많았고 낸 금액도 적었다.

 장기하의 실험은 어떨까. 열흘 남짓한 시간, 1400여 명이 다운받고 200만원을 냈다. 평균 1400원 정도. 국내 평균 다운로드 가격 100~600원보다 월등하다. 70% 넘게 돈을 냈다고 한다. 행사를 같이 기획한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은 트위터에 “많은 분들이 응원가를 낸 것 같다”며 반겼다. 결과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성공작이란 평가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어진다’고 믿는 한국인들, 인터넷 세상도 바꿀 수 있을까. ‘공짜 점심은 없다’로.

글=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사진=강일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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