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문혁」 혼미 속의 전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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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공의 문화혁명은 혼미 속에서 후퇴 기미를 보이며 전환을 전조하고 있다. ①당 이론지 「홍기」의 온건한 사설에서 엿보이는 정책 변화 ②국가주석 유소기와 일부 군 간부들에 의한 당 중앙위 소집요구설에서 암시되는 실권파의 강경한 저항 ③그 동안 홍위대 폭주를 견제하는 등 모 사상 일변도만은 아니었던 중도적인 주은래의 국가주석 취임설과 함께 그의 두드러진 대두 ④임표가 그동안 『모 주석의 가장 친밀한 전우』로 홍위대에 불리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엔 『주가 모 주석의 가장 친밀한 전우』로 불려지는 데서 시사되는 「문혁」 주류파의 분열 기미 등 여러 징후는 「문혁」이 전환에 이른 것으로 진단되기엔 충분하다. 이러한 모든 징후와 홍위대의 무질서 상태로부터의 정돈은 금년 중에는 매듭짓지 않을 수 없는 수정주의적 실권파에 대한 처리에서 그 동안의 폭력적인 방법을 지양, 절충주의적 자세로 합법적 처리에로의 이행 전 현상으로 해석된다.
당 정책을 대변하는 「홍기」 3호는 『적대성의 모순과 인민 내부의 모순을 혼동해서는 안되며, 다른 견해를 가진 대중과 대중조직에 대해서도 단결의 방침을 취하여 대다수를 획득할 것이며 대수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함으로써 작년 8월이래 홍위대의 뭐든지 낡은 것은 때려부수는 방식을 반성했다.

<갈수록 부드럽게 변하는 홍기 논조>
홍기 4호의 『실권파이면 무턱대고 타도할 대상으로 생각함은 모 사상에 위배된다. 견해가 다른 자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을 실행하는 간부는 당과 인민의 귀중한 보배』라는 주장은 수정주의 노선에 대한 투쟁이란 기본원칙은 견지하면서도 「인민 내부의 모순」의 테두리에서의 「평화공존」을 진일보시켜 홍기 3호보다 부드러운 논조라고 볼 수 있다. 이상 3, 4호의 사설은 무질서·무궤도·무정부적인 종래의 「문혁」의 방향을 명백히 견제한 것으로 해석된다.
홍기 사설에 대해 인민일보도 동조했거니와 그 이후 이를 뒷받침하는 벽보와, 그리고 주은래도 2월 18일에 간부들에 대한 무분별한 투쟁 등 좌익편향 노선을 시정할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5호 사설은 『일부에서 혁명적인 삼결합(수정주의 타도 방법으로 표방된 방식=혁명간부·대중·군 간부의 결합) 방침을 해이케 하여 「결합」을 구실로 절충주의·조화주의를 취해 당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끌어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삼결합」 방식을 둘러싼 주류파 내부에서의 「평화공존파」와 「급진파」간의 이견을 암시하고 있다.

<삼결합 방식 싸고 양파간 이견 뚜렷>
그 동안 8개월여에 걸친 이른바 「생사를 건 투쟁」에도 불구하고 유소기를 정상으로 한 군 간부 등 굽힐 줄 모르는 실권파들은 문화혁명문제를 결착짓기 위해 합법적 기관인 당 중앙위 소집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주류파가 추진하는 「홍위병 혁명」이란 일종의 비법적 투쟁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며, 중앙위 정치국에서 6대5로 유가 수정주의자로 낙인 규탄 받은 데 대해 일종의 소 전당대회 격인 중앙위에서는 실권파가 다수파라는 자신에 의한 도전으로 생각된다. 유 등의 중앙위 소집요구 설에 대해 국부계 관측자들은 중앙위원 88명 중 과반수인 48명이 반모파이기 때문에 모는 중앙위 소집을 반대하고 있다고도 관측하고 있다.

<과격한 임표 노선 혼란수습에 실패>
국가 주석의 경질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나 전당대회에서만 결정될 일이지만, 주은래의 임시 국가주석 대행설이 사실이라면 이는 다음과 같은 사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즉 홍위병 등장이래 모와 가장 가까운 동지로 추앙 받았던 임표를 대신하여 홍위병의 폭주를 견제하며 「문혁」의 과격한 추진파에 결코 동조만은 하지 않았던 주가 두드러지게 대두하고 국가주석으로 등장했다는 설은 과격한 임표 노선으로는 그 동안의 혼란을 수습할 수 없어 주의 절충주의의 등장이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주가 「문혁」과정에서 취해 온 태도는 유·등으로 대표되는 실권파와의 절충이었고 조화였던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

<질서회복의 조건 문혁과 생산 병진>
이는 수정주의자라고 홍위대의 규탄을 받아 온 주 계열의 담진림·이부춘·이선념 등이 혁명간부로 계속 주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그렇다면 「삼결합을 구실한 절충주의·조화주의」를 경계한 홍기 5호 사설은 주의 절충주의를 지적한 것이며 주에 대한 「모 주석의 가장 친한 전우」란 일부 홍위대 벽보는 「문혁」 주류파 안의 대립분열이 노정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문혁」 과정에서 노출된 이상의 모든 현상은 「문혁」이 당초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단계에 이른 것으로 추단될 근거인 것이다.
「문혁」과 생산을 병진시켜가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등장한 주의 절충주의는 모가 후사를 맡길 수 있는 방침은 아닐지라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모의 중공도 조만간 수정주의화가 불가피한 징조로 볼 수 없을까. <이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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