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욕하는 연애가 리얼한 연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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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가장 좋아하는 멜로 영화의 이별 장면을 고르라면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꼽는다. ‘쿨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탓일까.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남자와 혼자 남아 묵묵히 생선을 굽는 여자, 그 담백한 이별이 마음을 흔들었다. 지난달 21일 개봉해 140만 관객을 돌파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영화 ‘연애의 온도’(노덕 감독)도 꽤 인상적인 이별 장면을 남겼다. 놀이공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남녀, “먼저 갈게”라는 짧은 인사와 간단한 악수로 마무리되는 인연.

 영화는 같은 은행에서 3년째 비밀 연애를 해 온 동희(이민기)와 영(김민희)이 이별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당연히, 끝났다고 다 끝난 건 아니다. 영화는 사랑에 빠질 때의 흥분 대신, 사랑을 접는 순간의 혼돈과 지리멸렬함에 주목한다. 헤어지긴 했지만 아직 감정이 마무리되지 않은 남녀는 서로의 SNS를 훔쳐보고, 약속을 미행한다. 과거에 받은 선물을 망가뜨려 착불로 보내고, 커플요금 해지 전 소액결제로 휴대전화 요금폭탄을 안기는 유치한 복수를 일삼기도 한다. 밀고 당기고 매달리고 뿌리치다 결국 바닥까지 보여주고야 마는, 잊고 싶던 그 시간을 낱낱이 까발려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연애의 온도’의 한 장면. [사진 뱅가드 스튜디오]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주인공들의 욕설이다. 여자 주인공 영이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상사 앞에서 전 남친 들으라는 듯 “저 눈 안 높아요. 맨날 양아치 같은 것들한테 뒤통수만 맞고 다니는데”라고 비꼬는 장면까진 웃으며 봐줄 만했다. 하지만 직장 동료들 앞에서 “너 같은 미친X은 정말 처음” “이런 개XX가”라고 쌍욕을 주고받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저런 막말을 주고받고도 다시 웃으며 마주 볼 수 있는 사이라니. 그러나 영화가 끝나는 순간, 이런 반감이 세대 차이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옆 자리에 앉은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여성들이 감탄했다. “아, X나 리얼하잖아.” “씨X 완전 재밌어. 별점 백 개 줘야지.” 요즘 학생들은 75초에 한 번씩 욕을 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니, 영화 속 욕설이 ‘연애의 민낯을 보여주는 명대사’로 칭송받는 게 무리는 아닐지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진정 리얼하다 느낀 건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다. 특히 두 사람 사이에서 각종 뒤치다꺼리를 도맡는 은행 후배 박 계장(김강현)은 발군이었다. 정작 자신은 연애도 못하면서 남들의 사랑놀음에 이용만 당하는, 그래서 ‘용만이’로 불렸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한참을 웃었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