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분노하는 한국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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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스케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거친 다툼과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간의 한미 정상회담 중 어떤 쪽이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말하기 힘들다.

두 사건 모두 반미 정서의 분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상회담이 끝나자 정치적 관계는 훨씬 부드러워진 것처럼 보였다. 많은 한국인들은 부시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쇼트트랙에 관해서라면 말은 달라진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측의 긴장은 상당히 높았다. 한국은 미국 정부가 한국의 대북 포용 정책인 '햇볕정책'을 헐뜯지 않길 원했다. 또 부시가 북한 정부에 '악의 축'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일에 대해서도 불만족스러웠다.

미국은 한국을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부시가 자신의 대북 강경 정책 입장에서 후퇴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부시는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칭송하며 조심스럽게 '악의 축'에 대한 얘기를 자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부시가 '햇볕정책'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했다고 말했다.

부시 방문 일정이 21일 오전에 마칠 때, 양측은 다시 한 번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 척 했다.

물론 실제로는 아니었다. 부시는 김 대통령을 위해 체면을 지켰지만 처음의 강경 입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고 김 대통령은 내년 초 임기가 끝난다.

김 대통령은 포용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미국은 북한에 압력을 가하면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상회담 일정 중 한 곳은 매우 적절한 배경을 제공했다. 바로 경의선 남쪽 최북단 역인 도라산역이다.

경의선은 비무장지대(DMZ)를 가로질러 남북한을 다시 연결함으로써 한반도 최남단에서 런던까지 끊기지 않는 기차 여행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약속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찻길은 도라산 북쪽 비무장지대 수백 미터 뻗어나가다 남쪽 경계선쯤에서 사라진다. 김 대통령은 "이 역은 현재 휴면 상태"라고 말했다. 그의 햇볕정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솔트레이크시에서 한국 쇼트트랙의 희망들이 꺾이고 있는 지금 누가 이런 일을 신경쓰겠는가.

16일 나가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동성은 중국의 리쟈준과 부딪쳐, 많은 한국인들이 당연히 김동성이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경기에서 탈락했다.

한국인들은 리쟈준이 김동성을 밀었기 때문에 실격되어야 했다고 생각했고 -- 비디오를 재생해 보면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 모든 메달을 독차지하려는 미국의 계략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승에서는 또 한국 선수 안현수가 혼전 도중 넘어졌다. 그리고 미국 스타 아폴로 오노도 넘어졌다. 한국인들은 다시 미국인들의 책임 문제를 거론했다(오노는 이 경기에서 은메달을 건졌지만 안현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한 한국 텔레비전 아나운서는 "미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세계의 비난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거기에 하나 더 추가될 것이다."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들은 "미국이 홈 경기장이라는 점을 너무 이용한다"는 내용의 불만으로 가득찼다.

부시가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고 미국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한국 쇼트트랙 코치진이 항의하지 않았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도를 넘은 발언도 일부 있었다. "이제 나는 빈 라덴을 이해할 수 있다." 21일에는 상황이 훨씬 악화됐다. 김동성이 1천5백 미터 결승에서 미국의 오노를 누르고 우승했지만 결국 실격 당했다. 당시 그는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며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호주 심판은 김동성이 경기 중 오노의 진로를 부당하게 막았다고 판단한 듯했다. 또 다시 한국은 미국의 음모를 목격했다. 한국 기자들은 격분했고 시상식에서 오노가 금메달을 받자 야유를 보냈다.

한 한국인 여성은 TV 기자에게 "오노가 러시아인이거나 중국인이었다면 같은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 그냥 스케이트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올림픽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한 한국인 학자가 지적했듯이 한국인들은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의 성공적인 성적을 한국의 산업 발전의 지표로 삼았다. 이는 동구권 국가들이 과거에 했던 행동과 유사하다.

한국에서 저변에 흐르고 있는 반미감정에 불을 붙이는 것은 그리 힘든일이 아니다. 이번 쇼트트랙 사건과 관련한 한국인들의 분노는 한미 양국이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든 불거질 수 있는 문제가 표출된 것일 뿐이다.

DONALD MACINTYRE (Time) / 이인규 (JO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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