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배용의 우리 역사 속의 미소

성묘 길에 핀 봄날의 미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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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

며칠 있으면 한식이다. 한식은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로 설날, 한식, 단오, 추석의 사대명절 중 하나다. 긴 겨울 얼었던 땅이 녹아서 묘소가 파손된 곳에 다시 떼를 입히고 조상께 차례도 지내는 날이다. 예부터 한식에 찬밥을 먹는다는 유래는 중국 진나라 때 불에 타 죽은 충신 개자추의 고사에 기인한다. 한편으로는 한 해의 불씨를 새로 지피는 날이라 밥을 지을 수가 없어서 찬밥으로 대신했다는 의미도 있다.

 그림 속에 ‘한식에 산소 보러 가는 모양’은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金俊根)의 작품이다. 기산은 개화기에 당시 조선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소재를 중심으로 그린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성묘 길에 나선 두 여인 중 장옷을 걸친 여성은 양반가의 주인마님이고 그 옆에 두루마기를 입은 어린아이는 아들인 것 같고 그 앞에는 차례 지낼 음식을 목판에 담아 이고 가는 하녀가 그려져 있다. 이들의 모습에서 두 여인의 자주색 끝동과 어린아이의 자주색 두루마기가 색감의 하모니로 이어지고 다정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 발걸음은 활기찬 것을 보면 겨우내 집안에서만 갇혀 있다가 성묘 길에 봄나들이도 겸한 해방감을 맛보고 있는 분위기다.

김준근 ‘한식에 산소 보러 가는 모양’ [소장 프랑스 기메박물관]

 조선시대는 가부장제가 엄격했던 시절이다. 유교적 규범 속에서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한 가족질서를 중시했기 때문에 여성들의 바깥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소위 내외법(內外法)이다. 양반가 여성들의 재혼은 실제로 금지되었고, 경국대전에 사대부가의 여성이 산간이나 물가에서 놀이 잔치를 벌이면 곤장 100대로 다스리는 조항까지 있는 것을 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여성들에게 정식으로 교육이 실시되고 의식이 새로워지면서 서서히 장막이 벗겨지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되었다. 이제는 유리천장까지 깼으니 앞으로 여성인재들의 활약이 더욱 돋보일 것이라 기대된다. 봄날 꽃들이 활짝 피고 새 생명의 기운이 무르익는 계절, 길에 나선 여인들의 꿈과 소망을 담은 미소가 봄꽃보다 더 아름답다.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