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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창조경제의 핵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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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세영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
본부장·단국대 교수

최근 어느 대기업에서 통섭형 인재 양성을 위해 인문학 전공자를 뽑아 자체 교육을 통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키우겠다는 발표를 했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걸머지고 있는 대기업이 마침내 인문학에서 창조경제의 원천 인재를 육성하는 기획을 마련했다는 것은 인문학 연구의 재정 지원에 소정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무척 환영할 만한 일이다.

 미국 유타(Utha)대학의 석좌교수인 거르스 맨검(G. L. Mangum) 교수는 이미 30여 년 전에 산업혁명 이전을 ‘농업시대’, 산업혁명부터 20세기 후반 정보통신산업을 통한 지식혁명이 일어난 시기까지를 ‘산업시대’, 그리고 그 이후를 ‘지식시대’라고 명명했다.

 ‘농업시대’에서 인간의 경제생활은 주로 의식주 문제의 해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 수단은 인간 노동력과 천연자원이나 가축의 활용이었다. 산업혁명에서 비롯된 ‘산업시대’에서는 약 8000년 동안 주업으로 영위해 온 농업이 그 지위를 잃어가면서 가축이나 인간의 노동력은 연장이나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를 맞이했다. 기업들은 생필품 생산에 주력하는 한편 철강재 등 산업재를 대량 생산했으며, 이를 중간재로 하는 자동차와 조선산업 등이 발전했고, 이들 산업은 국제경쟁력을 가졌다. 이런 ‘산업시대’에서는 자본이 국가경쟁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0세기 후반 지식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선호나 기호, 감성 등에 맞는 상품의 생산에 역점을 두는 ‘지식시대’가 열렸다. 이 시대에는 인문학에 바탕을 둔 상상력에 의한 창의력이 기업과 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간이 무엇을 바라고 원하며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이해하고, 그것에 부응하는 알맞은 상품을 생산해야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기술 수준이 높은 나라나 기업도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인문학이 창조경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식시대’에는 IT(정보통신)산업이 그 중심에 있다. 모든 산업의 경쟁력이 IT산업과 얼마나 잘 융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화두는 어떻게 한국형 창조경제를 만들어 내느냐다. 창조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화적 가치를 재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지식 생태계는 17세기 과학혁명 이래로 자연과학 주도로 진행된 학문의 분화를 해체해 재구성하는 학문 융합의 방향으로 진화해 나가고 있다. 오늘의 인문학이 지식 생태계가 융합의 방향으로 진화해 나가는 데 도태당하지 않고 선도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의 정체성과 역할을 재규정하는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이 같은 시점에서 한국 경제의 선두에서 변화를 이끌고 있는 대기업이 인문학 기반 융합형 인재를 육성하겠다고 나선 것은 인문학자들에게 위기 극복의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 변신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큰 변화(Mega-Change)’에 대응하는 과제를 기업에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 정부도 인문학이 과학과의 통섭과 융합을 통한 창의력과 경쟁력을 일궈내고 고양시켜 나갈 수 있도록 정책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창조경제 시대에서 인문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뿐 아니라 돈이 되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일자리 창출로부터 선진 일류 국가로의 진입, 그리고 국민 행복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은 우리 삶의 등불이 되므로 “인문학, 세상에 희망을 전하다”라는 2013년 인문주간의 캐치프레이즈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김 세 영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 본부장·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