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스펙터클 '블랙 호크 다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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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호크 다운'은 전쟁영화지만 묘한 유머가 배어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전진 한가운데에서 고립된 몇 명의 병사들이 있다. 이들은 길을 잃고, 소말리아의 낯선 공간에서 방황한다. 처음엔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열심히 기관총을 쏴대고, 상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질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는다. "어, 우리들 적진에 고립된거 아니야?" 두리번거리던 병사들은 총을 메고 거리를 뛰어다닌다. 동료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와중에 한 미군은 동료의 요란한 총소리 탓에 귀가 들리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작전지시 따윈 들리지도 않는다. 거의 코미디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블랙 호크 다운'은 도발적인 영화다. 1993년, 미군부대가 UN 평화유지작전의 일환으로 소말리아에 파견된다. 이들은 소말리아의 민군대장인 에이디드의 부관들을 납치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미군 정예부대의 맷 중사는 부대를 지휘하고, 특수병 그림스는 실제 전투에 참가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민병대의 공격으로 미군의 블랙 호크 헬리콥터 두 대가 순식간에 격추된 것.

여기서부터 영화는 거의 (체감의 영역이겠지만) 실시간으로 전쟁터의 모습을 비춘다. 1시간 이내에 완료될 예정이었던 작전은 하염없이 지연되고, 고립된 부대원들은 구조대가 올때까지 소말리아 민병대의 공격을 받으며 버텨야한다. 지옥이 따로 없다.

어떤 이는 '블랙 호크 다운'을 보면서 묘한 흥분이나 혐오감을 느낄지 모른다. 이게 영화인가, 아니면 CNN 방송을 편집과정없이 시청하고 있는 건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면서. 영화의 서사는 간략하고 짧다. 예측불허의 공간에 갇혀버린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생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참상을 전하자면, 이렇다. 총상을 입은 한 병사는 아무 수술도구없이, 다른 동료의 손이 그의 신체 속을 헤집고 다니는 신세가 된다. 총상으로 핏줄이 맥없이 끊긴 탓이다.

열심히 총세례를 퍼붓던 다른 병사는 우연히 거리에 떨어져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이름모를 병사의 잘린 손마디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있던 또다른 병사는 포탄이 그의 몸에 정확하게 박혀버리는 신세가 된다. 물론 병사는 숨을 거두지만 포탄은 여전히 허리 부분을 관통하고 있는 상태다.

'블랙 호크 다운'은 이미지와 스펙터클로 승부하는 영화다. 소말리아의 황량한 풍경은 때로 푸른 빛으로 포착되어 환상적인 이미지로 둔갑하고 스펙터클의 집중세례는 보는 이를 숨막히게 한다. 해외에선 "심미적인 전쟁영화"라는 찬사를 받는 중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존 할리우드 전쟁영화와 차별화되는 것도 사실. 할리우드 영화치곤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영웅의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운 탓이다. 피와 살점의 축제, 그리고 요란한 총성이 계속되면서 '블랙 호크 다운'은 압도적인 상황과 볼거리 속으로 관객을 몰아넣는다. 전쟁터의 참상은 한없이 지속되고 있어 촬영감독 슬라보미르 이지악은 여섯 대 이상의 카메라로 동시에 촬영하면서 현장의 생생함을 부추긴다.

'블랙 호크 다운'은 최근 '한니발'과 '글래디에이터' '지 아이 제인' 등을 만든 리들리 스콧 연출작. 전쟁 속 영웅들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은 점은 역설적으로, 영화의 흥분을 고조시키는 엔진 역할을 한다. 반면,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킬 만큼 '극사실적인' 전쟁영화가 무엇을 남기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남는다. 소말리아에서 고립된 미국 군인들은 피범벅이 된채 헤매고 다니지만, 그들의 모습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얼핏 스포츠 선수에 가까워보인다. 팀웍과 동료애, 그리고 승리에 관한 의지로 똘똘 뭉친 순진무구한 운동선수들 말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전우애야"라는 어느 병사의 대사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당연하고도, 심금을 울리는 대사긴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기란 힘들다. 이 화려하고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지옥의 쇼는 언제까지나 계속될까?

김의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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