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 전문성보다 ‘코드’는 힘이 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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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고학찬

고학찬(66)씨가 서울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고 유진룡(57) 문화부 장관의 의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통 문화관료로 예술계 인맥이 누구보다 넓은 유 장관 아니던가. 청와대나 권력 핵심부의 뜻이 작용했을 게다.

 “배 째 달라구요?” 같은 말을 들을 정도로 배포 있던 유 장관도 새 정부 집권 초반기인 터라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설마 “거봐, 공연계 사람 시키니 망가지잖아. 과거처럼 문화부 출신이 하는 게 나아”라는, 차기 예술의전당 사장까지 고려해 방관했을 거라곤 믿고 싶지 않았다.

 인선 배경에 대해 문화부는 “고씨가 윤당아트홀 사장으로 전문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윤당아트홀? 어딘가 가물가물했다. 기억을 더듬으니 2년 전인가 한번 간 기억이 났다. 서울 강남 도산공원 부근에 있던 소극장이었다.

 그냥 그랬다.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대부분 프로그램은 ‘뉴보잉보잉’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처럼 대학로에서 히트친 연극을 다시 올리는 식이었다. 이런 소극장, 서울에만 100군데도 넘는다.

대한민국 공연의 메카인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전경. [중앙포토]

 이력을 살펴보았다. 고씨는 1970년대엔 동양방송(TBC) PD였다. 80년대 들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90년대 중반 귀국해 삼성영상사업단 국장, 추계예술대 겸임교수 등을 거쳐 2009년부터 윤당아트홀 사장을 지냈다.

 방송계이든 공연계이든 뚜렷한 업적이나 존재감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대표 공연장 수장을 맡기면서 “정치적 고려는 없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익히 알려진 대로 고씨는 박근혜 대통령 대선후보 시절 싱크탱크였던 국가미래연구원 소속이었다. 5명의 장관, 5명의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을 배출하며 현 정권 파워집단인 그곳 말이다. 2010년 출범 당시 발기인 70여 명 중 고씨는 유일한 문화예술계 인사였다. ‘코드 인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솔직히 코드 인사면 어떤가. 권력 잡으면 자기가 믿는 사람 기용하는 거, 인지상정 아닌가. 좌파건 우파건 지금껏 그래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거다. 문제는 코드 인사에도 ‘정도’(程度)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고씨가 숨겨진 보석일지 모른다. 인간성 좋고 뛰어난 업무능력을 갖추었을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의 공연계 이력만 놓고 보면 비유컨대 중소 케이블 방송사 운영자가 단박에 KBS 사장에 오른 꼴 아닌가. 유소년 축구클럽 감독이 하루 아침에 국가대표 감독이 되는 게 정상이냐는 말이다.

 결국 전문성 운운은 허언(虛言)으로 끝난 모양새다.

고씨의 발탁을 보며 젊은 공연 기획자, 스태프, 공연장 직원들은 과연 무엇을 떠올릴까. 겉으론 화려할지 몰라도 그들은 엄청난 업무강도와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무대를 떠나지 않는 건 “훗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내가 진짜 원하던 공연을 꼭 올려 보고 싶다”란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실력을 키우며 한발한발 정진하는 게 얼마나 순진한 일임을, 그보다는 정치판을 기웃거리며 유력 인사의 후원회를 빈번하게 드나들어야 함을 이번 인사는 다시 한번 확인해준 걸까. 정치에 포박된 한국 문화예술의 씁쓸한 현주소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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