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25) 공인 첫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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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2년 고건 전 총리가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발령 났을 때 찍은 사진. 아래 왼쪽부터 김수학 내무부 기획계장, 김영재 행정계장, 김보현 행정과장, 김성배 인사계장. 그 뒤 13회 고등고시 동기들, 왼쪽부터 노건일, 박병효, 이상배, 고건, 신기악, 최휴섭, 신석호, 김영진.

1945년 광복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사들이 속속 귀국했다. 라디오와 신문에서 그들을 애국자(愛國者)라고 불렀다. 당시 애국은 지금처럼 거창한 단어가 아니었다. 늘상 쓰는 말이었다. 나랏일을 하면 바로 애국자였다. 소년 시절부터 나랏일을 맡는 애국자가 되고 싶었다.

 커가며 정치인을 꿈꿨다. 어머니는 의사가 되길 바랐고 아버지는 스스로 결정하라고 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하고 문리대 학생회장과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한 것도 정치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회장 출신이면 대개 정치 무대로 나갔다. 맘만 먹으면 국회의원 보좌관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할 때는 자유당 말기였다. 장기 집권과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됐던 시기다.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정치가 아니라도 나랏일을 하는 길이 있었다. 바로 행정이었다. 내무부로 들어가 군수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 고을을 책임지고 개발하면서 잘살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뒤늦게 고등고시로 방향을 돌렸다. 학생회장 일을 하느라, 연애를 하느라 공부가 부족했나 보다. 처음 도전한 제12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낙방했다.

 공부가 부족하면 착각하기 마련이다. ‘합격이 틀림 없다’는 예감에 대학생 때부터 사귀었던 동갑내기(조현숙 여사)와 결혼했다. 기세등등하게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짜도 고등고시 합격자 발표일로 잡았다. 동대문 대폿집에 신부를 기다리라고 앉혀놓고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 법대로 향했다. 그때는 합격자를 알리는 방이 법대 교정에도 붙었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이름이 없었다. 신부가 있는 동대문 근처 대폿집으로 돌아왔다.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취기가 한껏 오르자 동대문 사거리로 나가 길바닥에 드러누웠다. “이건 무효야, 무효”라고 소리쳤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내 인생 최초의 실패였다.

 스물두 살 동갑내기 아내와의 신방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청량리 집에 차렸다. 그 집은 서울대 교수 관사였다. 집에 딸린 양계장의 닭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작은 방 둘을 들였다. 연탄 아궁이로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는 신혼방이었다. 졸지에 가장이 됐으니 생계를 꾸려야 했다. 남산무역회사에 입사했다. 낮에는 회사에 나가 일하느라 밤에 고시 공부를 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은 고달팠다. 시험 준비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회사에 사표를 냈다. 다행히 회사는 휴직 처리를 해줬다. 월급의 절반을 받았다. 반이나마 나오는 월급을 신부에게 생활비로 맡기고 수락산 중턱 흥국사란 절에 들어갔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절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고 61년 10월 고등고시에 재도전했다. 배가 부른 아내는 돈암동 산원으로, 나는 성균관대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틀 동안 시험을 치고 돌아오니 첫 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그해 12월 5일 제13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자가 발표됐다. 1년 전 아픈 기억을 억누르며 서울대 법대 교정으로 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을 읽어 내려갔다.

 ‘제1부 일반행정…조재석, 최상엽, 고건…’

 내 이름이 있었다. 첫 아이 덕인가. 합격했다. 1년 가까이 미뤄왔던 군수의 꿈이 다시 부풀었다. 지방자치제와 지방선거제도가 시행되기 훨씬 전이다. 내무부 공무원이 군수로, 도지사로 임명되던 시절이다. 내무부를 자원했다. 정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군수에 매력을 느꼈다. 고시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62년 원했던 대로 내무부에 배정됐다.

 자신만만한 청년 고건으로 다시 돌아왔다. 앞으로 내 인생에 좌절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지식

고등고시

행정·기술 부문 고위 공무원과 사법 부문 검사·판사·변호사를 뽑기 위해 실시했던 자격시험. 지금의 행정·기술·외무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과 사법시험에 해당한다. 1949년 시행했고 1963년 이후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일명 행정·외무·기술고시)과 사법시험(사법고시)으로 대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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