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겠는데, 아베 맘대로 돈 찍어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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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본은행(BOJ) 내부에서 논쟁은 드문 일이었다. 조용한 대화를 거쳐 통화정책이 결정됐다. 하지만 앞으로는 시끄러워질 전망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명한 인물들이 통화정책위원회(MPC)에 합류해서다. 주인공은 바로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를 비롯해 부총재인 이와타 기쿠오와 나카소 히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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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사람은 15일 의회 임명 동의를 받았다. 20일 취임한다. 글로벌 시장의 관심 속에 이른바 ‘구로다 총재’ 체제가 출범하는 셈이다. 미즈호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우에노 야스나리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BOJ 정책철학이 급격히 바뀔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경제와 재정 개혁 중시’에서 ‘디플레이션(장기 물가 하락) 해결’ 쪽으로 바뀐다는 얘기다.

 정책철학의 전환은 사실상 충돌과 같은 말이다. MPC엔 옛 철학을 지키려는 인물들이 적지 않아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기우치 다카히데와 사토 다케히로 정책위원들이다. 두 사람은 양적 완화(QE)에 미온적인 인물들이다.

 실제 두 사람은 2월 MPC 회의에서 인플레이션 목표를 2%로 높이는 데 반대했다. 두 사람은 경제의 체질 개선과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가 넘는 국가부채 해결을 강조한다.

 경제와 재정 개혁은 1990년 이후 23년 동안 BOJ의 핵심 패러다임이었다. 이를 처음 제시한 사람은 80년대 후반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군 거품을 제거한 미에노 야스시 전 BOJ 총재였다. 그는 90년 2월에 “경제와 재정을 개혁하기 위해선 희생(디플레이션)을 감수해야 한다”며 “긴축 고삐를 늦추면 개혁 의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미에노 노선이 20년 넘게 유지된 바람에 MPC 중도파 가운데도 구로다의 양적 완화와 엔저 공세를 선뜻 지지하지 않을 만한 인물들이 있다. 모리모토 요시히사 위원이 그런 인물이다. 그는 도쿄전력 임원 출신이다. 그는 “일본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채권을 대대적으로 사들이는 것이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중도파인 이시다 고지 위원도 “물가상승 목표 2%는 너무 높다”고 자주 말했다.

 양적 완화 반대파 4인방과 맞설 위원들로는 이와타 부총재를 비롯해 시라이 사유리, 미야오 류조 등이 꼽힌다. 구로다 총재까지 합하면 양적 완화 지지 세력은 모두 4명이다.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 시절엔 두 명에 지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도쿄시장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양적 완화론자들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반대파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다”고 지적했다. 다수결 원칙이 적용되는 MPC에서 구로다가 입맛에 맞는 정책을 쉽게 채택하기 위해선 적어도 5표가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캐스팅보트는 아베가 지명한 또 다른 부총재인 나카소 히로시 수중에 있다. 나카소 부총재는 78년 BOJ에 들어갔다. 36년 동안 BOJ에서 잔뼈가 굵어 미에노 노선을 따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는 BOJ 내부에서 한직에 속하는 국제부서에서 오래 일했다. BOJ 출신이기는 하지만 기존 노선과 다른 행보를 보일 수도 있다. 실제 그는 이달 12일 의회 인사청문회에서 “강력한 양적 완화를 통해 BOJ 기능이 대부분 작동하도록 하겠다”며 “전례에 얽매이지 않은 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양쪽 세력이 맞설 운명의 날이 머지않았다. 4월 3~4일 정례 통화정책회의가 예정돼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불꽃 튀기는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핵심 쟁점은 무제한 자산 매입이다. 현재 BOJ는 101조 엔(약 1180조원) 한도 안에서 국채 등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양적 완화를 하고 있다. 내년 1월 이후에나 무제한 자산 매입을 하기로 했다. 아베 총리는 무제한 자산 매입을 앞당겨 당장 실시해 주길 바라고 있다.

 구로다 총재와 이와타 부총재는 의회 인사청문회에서 무제한 자산 매입의 조기 실시를 지지했다. 남은 일은 표결이다. 무제한 양적 완화가 가결되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엔저 공세가 펼쳐진다. 한국과 중국 등 이웃 나라 반발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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