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만이 살길” 수백억원 들여 전자잉크 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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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춘 잉크테크 대표는 세상에서 발명이 제일 재미있는 사람이다. 직원들이 “우리 사장님 취미는 연구, 특기는 개발”이라고 말할 정도다. [오종택 기자]

‘오늘의 첨단기술이 내일의 첨단기술일 수는 없다’.

 정광춘(61) 잉크테크 대표의 소신이다. 기업마다 강점은 다르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만들어라, 그러면 내가 판다”는 식이라면 정 대표는 “잘 만들면 팔릴 것”이라고 자신하는 쪽이다. 잉크테크는 기술 중심 기업이다. 1992년 설립 이후 줄곧 기술이 회사의 명암을 갈랐다. 잘나가던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도,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해낸 것도 기술이었다. 직원들은 “우리 사장님 취미는 연구, 특기는 개발”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최근 경기도 안산시 본사 공장에서 만난 정 대표는 “원래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고 말했다. 닭이 자기 머리만 한 알을 도대체 어떻게 낳는 건지 궁금해 서너 시간씩 암탉을 지켜보기도 했다. 정 대표는 발명가가 되기 위해 한양대 화학과에 들어갔다. 재학 중 특허를 4건이나 냈다. 친구들은 그에게 ‘발명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KAIST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후 창업의 길로 갔다. 1985년 첫 회사(해은화학연구소)를 세웠다. 자체 기술 개발이 어려운 기업에 기술을 파는 기술용역 회사다. 그렇지만 ‘무형의’ 기술에 돈을 내겠다는 기업이 없었다. 그래서 기술에 더해 ‘유형의’ 제품까지 파는 회사로 방향을 틀었다. 90년대 초반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프린터가 대중화됐다. 프린터 기계값 자체는 싼데, 잉크 가격이 너무 비쌌다. 정 대표는 1992년 리필 잉크를 파는 잉크테크를 설립했다. 프린터 업체 사장이 “프린터 팔아도 돈 버는 건 잉크테크”라고 볼멘소리를 할 정도로 성공했다.

 2000년대 들어 정 대표는 전자잉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은이나 구리 등 전기가 통하는 전자잉크로 유리나 박막(薄膜) 필름에 회로를 그려 넣는 인쇄전자(printed electronics)다. 기존에는 기판 전체를 은으로 씌운 다음 원하는 회로만 남기고 깎아내는 방식을 주로 썼다. 공정이 복잡하고 재료도 많이 드는 데다 화학 쓰레기도 많이 나왔다. 반면 전자잉크를 인쇄하는 방식을 활용하면 신문을 찍는 것처럼 깔끔하게 회로기판을 만들 수 있다. 정 대표는 “10년 넘게 만들어온 게 잉크인데 전자잉크라고 못 할 게 뭐 있나 싶었다”며 “2002년 회사 돈 20억원과 정부 지원금 20억원을 들여 전자잉크 개발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이후 리필 잉크 팔아 번 돈 수십억원을 매년 전자잉크 개발에 쏟아부었다. 2005년 마침내 개발에 성공했지만 잇따라 불행이 닥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수주물량은 급감하고, 살자고 가입한 외환파생상품 키코가 죽자고 잉크테크의 자금줄을 좼다. 2009년 3월엔 자재 창고에 불이 나 완전히 타 버리면서 30억원의 피해까지 봤다. 하지만 위기가 오면 기업의 진가가 드러난다. 정 대표는 “직원을 가족으로, 협력업체를 파트너로 생각하고 사업했는데 그게 힘이 됐다”고 말했다. 직원이 똘똘 뭉치고 협력업체가 조건 없이 원재료를 우선 공급해줘 3개월 만에 정상화에 성공했다. 위기를 극복하자 2011년부터 서서히 성과가 나왔다. 각종 기술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전자잉크 매출이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2년간 적자를 보다 지난해에는 흑자로 전환했다.

 정 대표의 다음 꿈은 바이오산업 진출이다. 그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질병 진단에 필요한 바이오칩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진다”며 “우리가 만드는 전자잉크로 회로를 인쇄한 바이오칩을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글=고란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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