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사건의 실상, 사건의 내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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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성폭행 혐의로 피소된 한 연예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연일 폭로전이 이어지면서 전 소속사 배후설, 음모론 등 각종 설이 난무하고 있다. 고소인들 간에 진실 공방이 계속되자 일부 누리꾼은 “이번 일에 내막이 있다면 얼른 밝혀졌으면 하네요” 등의 반응을 내놓고 있다.

 어떤 일이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를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내막’이다. 이 ‘내막’이란 말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야전에서 장군의 거처로 삼는 막사를 두 겹으로 지어 삼엄한 경계를 펼친 데서 생겨났다. 먼저 외막(外幕)을 설치한 뒤 그 안쪽에 다시 내막(內幕)을 쳐서 물샐틈없이 경계함으로써 적군은 물론 아군조차 막사 안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유래한 ‘내막’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일의 속 내용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됐다.

 “조사원들이 사건의 내막을 캐고 있다” “한국 남성들이 중국 공안에 붙잡힌 일을 두고 내막을 잘 아는 한 교민은 터질 일이 터졌다고 말했다”처럼 사용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내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와 같은 경우다. 이때는 ‘내막’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어색하다. ‘내막’은 주로 의도적으로 숨겨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일의 내용을 이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실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처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실지로 알려진 일의 내용이 사실과 차이가 나는 경우에 실제의 내용을 가리킬 때는 ‘실상’이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내막’과 ‘실상’은 둘 다 어떤 사실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쓰임엔 차이가 있다. ‘실상’이 실제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이를 때 쓰인다면 ‘내막’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란 데 중점을 두고 말할 때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실상’은 실제 일어난 내용이므로 없을 수가 없지만 ‘내막’은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이번 일에 내막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네요”처럼 쓰는 건 문제가 없으나 “이번 일에 실상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네요”처럼 표현할 수는 없다.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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