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임 근로자, 제도 부실해 두 번 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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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9일 광주광역시 광주첨단신도시 공사장에서 박모(55)씨가 타워크레인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씨는 지난해 9월부터 인부 30여 명을 데리고 이곳에서 일해 왔다. 하지만 시공사가 자금난을 이유로 1월부터 임금을 주지 않았다. 박씨와 인부들이 받지 못한 돈은 9000여만원에 달했다. 박씨 동생(52)은 “인부들의 독촉 전화에 형이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임금 체불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근로자가 늘고 있다. 박씨 같은 자살뿐 아니라 ‘화풀이성 범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경남 김해에선 패널 제조업체 일용직 근로자 황모(52)씨가 임금 100만원을 받지 못한 데 앙심을 품고 공장에 불을 질렀다. 앞서 1월에는 충북 청주에서 임금을 받지 못한 근로자가 공사장 화물차를 훔쳤다 경찰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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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체불임금은 1조1771억원으로 전년(1조874억원)에 비해 8.2% 증가했다. 2009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 최고치(1조3438억원)를 기록한 뒤 줄어들다 다시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임금을 못 받은 근로자 수도 28만5000명으로 전년(27만9000명)보다 2.1% 늘었다. 고용부 관계자는 “건설업 등의 경기침체가 본격화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제도적인 허점이 문제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강승복 한국노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국내 체불임금 규모는 근로자가 수가 비슷한 영국의 열 배 정도”라며 “우리나라만 체불임금이 많다면 시스템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임금체불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점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실제로 체불 사건 상당수가 근로계약서조차 쓰지 않는 상태에서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지도·감독할 고용부 근로감독관은 900여 명뿐이다. 이 때문에 감독관 한 명이 한 달에 30~50건의 사건을 담당하는 상황이다.

 체불 사업주에 대한 처벌도 미미하다. 법률상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2000만원 이하의 처벌을 내릴 수 있지만 10건 중 6건이 100만원 안팎의 벌금을 물리는 데 그치고 있다.

 밀린 임금을 받는 게 쉽지 않아 근로자들이 장기간 생계곤란에 시달리는 점도 문제다. 법률구조공단 최철호 변호사는 “민사소송에 통상 6개월 정도 걸린다. 승소하더라도 강제집행을 통해 실제 밀린 임금을 받아내려면 1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임금을 못 받은 근로자를 돕는 제도에도 ‘구멍’이 있다. 밀린 임금 일부를 우선 받을 수 있는 체당금은 기업이 도산했을 때만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체불기업의 80%는 임금을 체불한 상태에서 운영을 계속하고 있다. 체불 근로자 1인당 최대 1000만원을 지원하는 생계비 대출은 금리가 3%대라 “빌려 쓰기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많다.

 고용부는 “체불임금을 청산하려는 사업주에게 대출 지원을 하는 등 대책 마련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이 제도가 도입된 후 현재까지 실제 대출을 받은 사업주는 6명에 불과하다. 6월부터는 고의·상습적으로 임금을 떼먹은 사업주 명단이 공개되지만 효과는 미지수다. 노무법인 기린의 황규수 노무사는 “3년간 2회 이상 유죄가 확정된 경우 등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며 “500~600명 정도 명단이 공개돼도 체불 억제 효과를 보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혜미·최경호 기자

◆체당금(替當金)=회사 도산으로 근로자가 임금·퇴직금 등을 못 받을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임금채권보장기금에서 사업주를 대신해 체불임금의 일부(최대 1560만원)를 지급하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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