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들 "한국서 살아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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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진입한 외국기업들이 1만1천여개로 불어나면서 이들의 생존경쟁이 날로 격화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선두를 다투는 다국적기업들조차 정보 부족과 시행 착오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후발업체에 시장을 뺏기는 일도 빚어지는 상황이다. 일부 낙오업체들은 한국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다.

이런 속에서 그동안 부진을 면치 못했던 다국적 기업들이 최근 한국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내놓거나 판매망을 늘리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다.

산업자원부 투자정책과 김숙진 사무관은 "지속적인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외국기업들의 경영 환경은 매우 개선됐다"며 "국내시장에서 이들이 경쟁력을 잃는 것은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당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속출하는 시장 포기=경쟁력을 급속히 잃고 있는 업체들은 주로 중소 외국계은행과 정보기술(IT)분야 쪽에 몰려 있다. 중소 외국계 은행은 기업 인수.합병(M&A)으로 덩치가 커진 국내은행과 선진 자금운용 기법으로 무장한 외국계 대형은행에 끼어 설자리를 잃고 있다.

한 미국계 은행 관계자는 "국내 소매 금융시장은 씨티은행.HSBC등 초대형 외국은행들이 장악하는 바람에 기업 금융 전문인 상당수 중소 외국계 은행들이 고전하고 있다"면서 "일부는 지점과 사무소를 축소하거나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외국계은행들의 모임인 주한외국은행사무국 이경희 국장은 "스미토모.도카이은행 등은 일본 본사의 구조조정까지 겹쳐 이미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외국 IT업체들도 한국내 관련산업의 침체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량 감원과 일부 사업 철수 등을 통해 자구책을 마련중이다.

◇ 재기를 위해 땀흘리는 외국기업들=영국.네덜란드가 합작한 세계적 생활용품.식품 메이저의 국내 법인인 유니레버코리아 임직원들은 요즘도 외환위기 직후 철수여부를 고민했던 때를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1985년 한국에 진출한 이후 경영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다 급기야 외환위기을 맞은 직후 사업장 철수까지 심각히 고민했을 만큼 어려웠던 회사 사정이 최근 2~3년새 급속히 살아나고 있기 때문.

이 회사는 1999년 매출이 5백여억원이었으나 지난해(추정치)에는 1천2백억원대에 달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이 회사는 한국에 진출한 뒤 애경(화장품).신동방(식품)등 국내 업체와 제휴했다가 '궁합'이 맞지 않아 결별한데다 시장점유율이 낮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업 철수 위기까지 몰렸던 이 회사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1999년. 본사 측은 고심을 거듭하다 철수 대신 철저한 현지화와 판매망 재구축전략을 폈다.

한국 진출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인 이재희 회장을 대표로 임명했다. 회사 관계자는 "회사 대표가 바뀐 뒤 1년여간은 판매.상품개발은 뒤로 미루고 전 임직원이 한국소비자들을 연구할 정도로 시장 분석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한국법인에서 자체 개발한 '도브크림 샴푸.린스'를 출시, 이 상품이 국내 고급샴푸 시장에서 한국 P&G의 '팬틴'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이 회사는 생활용품 선물세트 분야에서도 선전을 거듭하고 있다.

1997년 '토러스'.'몬데오' 등의 자동차가 잘 팔려 국내 수입차 업계 판매 1위를 달리다 이후 업계 6위로 미끌어지는 수모를 겪었던 포드세일즈서비스코리아도 명예 회복을 벼르고 있다.

이 회사가 한국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결정적 이유는 바로 외환위기 직후에 해 온 '수세적' 경영. 외환위기로 한국인들이 외제차를 사지 않을 것으로 지레 짐작해 당시 20여개에 달하던 전시장을 4개로 줄이는 등 판매망을 대폭 줄여버렸다.

포드는 지난해 4월 외국인에게 맡겨왔던 한국법인 사장을 한국인(정재희 사장)으로 교체하고, 매장 및 딜러망을 20여개 이상으로 확충하는 등 정상 탈환을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세계 최대의 할인점업체인 월마트도 생식품을 취급하지 않는 등 1998년 한국진출 초기에는 '값만 싸면 잘 팔린다'는 생각에 가격경쟁력만을 고집해 다소 부진했다. 그러나 최근엔 확 달라졌다.

서비스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외국인 소비자들을 위해 매장에 통역사를 배치하고 어린이용 쇼핑 카트도 비치해 두고 있다.

표재용 기자 pjyg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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