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장관급회담 공개 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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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핵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열린 제9차 남북 장관급회담을 '선전장'으로 이용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북측이 의혹을 살 만한 징후는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우선 북측이 장관급 회담을 공개하자고 주장한 대목부터 심상치 않다. 김영성(金靈成) 북측 수석대표는 22일 첫번째 전체회의가 열리기 직전 느닷없이 "회담을 공개적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북남회담에 민족의 기대와 관심이 큰 만큼 오늘 첫 회의는 쌍방의 입장을 대외에 알리는 방향에서 공개적으로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 金수석대표의 발언에 놀란 정세현(丁世鉉)남측 수석대표가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 집중이 잘 안된다"면서 "관례에 따라 비공개로 하자"고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북측의 회담 공개 제안은 지금까지 장관급회담 역사상 처음이어서, 우리측 회담 관계자들은 북측의 숨은 의도를 분석하느라 골몰하고 있다.

게다가 북측은 회담이 끝난 직후 10쪽이나 되는 장문의 '제9차 북남상급회담 기본 발언문'을 남한 언론에 배포했다. 북측이 남한 언론에 기본 발언을 알린 것도 처음이다.

기본 발언에는 '민족 공조로 전쟁의 위험을 막고 나라의 평화와 민족의 안전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등의 문구를 통해 민족 공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민족 공조에 동조하면 '애국'이고, 반대하면 '매국'이라고 규정해 놓았다.

특히 기본 발언은 '미국의 전쟁 위험은 전적으로 우리 민족을 굴복시키고 전 조선을 저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악의 야망의 산물이다''외세에 농락당하면서 동족을 해치는 것과 같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기본 발언문은 또 "북남 사이에 합의된 모든 협력사업들이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외세의 방해책동으로 인해 엄중한 제약을 받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 핵 위협으로 불거진 현재의 상황을 '외세(미국) 대 동족 대결'로 몰고 남북협력사업도 미국의 방해로 진전이 이뤄지지 못한다고 몰아붙여 한.미 정책공조에 균열을 가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의 방송은 과거와 달리 회담이 끝나자마자 기본 발언의 주요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우리측 회담 관계자는 "남한의 경제지원 확보에 역량을 쏟던 북측이 이번 회담에선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런 북한의 자세는 한.미.일 대북 정책공조를 허물면서 남남갈등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철희 기자ch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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