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몰던 남자, 베네수엘라 운전대 잡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부통령(가운데)이 5일(현지시간) 수도 카라카스에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발표하고 있다. [카라카스 AP=뉴시스]

“보라, 버스를 몰던 이 남자가 지금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5일(현지시간) 사망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니콜라스 마두로(51) 부통령을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던진 말이다.

 1962년 카라카스에서 태어난 마두로는 70년대에 쿠바로 건너가 1년 동안 노동운동을 공부했다. 귀국 후 버스 운전을 하다 카라카스 버스운수 노조위원장에 올라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80년대 차베스가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을 때 시작된다. 92년 쿠데타 실패로 차베스가 수감되자 마두로는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부인인 실리아 플로레스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그녀는 당시 차베스의 변호인단을 이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집요한 노력으로 2년 뒤 차베스의 사면을 이끌어냈다. 플로레스는 현재 베네수엘라의 법무장관을 맡고 있다.

 마두로는 석방된 차베스와 함께 제5공화국운동당 창당을 이끌었다. 차베스가 처음 대통령으로 당선된 98년에는 지역 조직책을 맡아 큰 역할을 했다. 2000년 국회에 입성했다.

 그가 정치력을 인정받은 것은 2006년 외무장관으로 일할 때였다. ‘차베스표 외교정책’ 뒤에는 대부분 마두로가 있었다는 것이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의 설명이다. 러시아·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수십억 달러의 차관을 받아낸 것 역시 마두로의 작품이다.

 차베스는 14년 집권 동안 부통령만 8명을 갈아치웠다. 조금만 권세를 누린다 싶으면 곧바로 교체했다. 하지만 마두로는 줄곧 낮은 자세로 막후에서 차베스를 도우며 신임을 쌓아왔다. 그는 종종 차베스를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이라고 불렀다.

 이번 대선에서 마두로의 상대는 지난해 선거에서 차베스에게 패한 야권 단일후보 엔리케 카프릴레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차베스의 적자’로 인정받은 마두로가 큰 격차로 카프릴레스를 앞서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마두로가 당선될 경우 그가 차비스모(차베스식 사회주의 이념) 기조를 계승, 발전시킬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그는 최근 연설에서 “다시 부르주아들이 이 나라를 약탈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AP통신은 “차베스가 추진했던 무상 의료 클리닉과 식료품 보조 등의 정책을 마두로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5일 차베스의 암이 ‘적의 음모’로 인한 것이라며 미국 외교관을 추방한 것만 봐도 당분간 차베스의 강경 반미 노선을 이어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서방 외교관들로부터 능숙한 협상가, 사교적인 행정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차베스와는 다른 외교정책을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가디언은 “차베스의 사망은 미국에는 양국 관계 복원의 기회가 될 것”이라며 “지난해 마두로와 로베르타 제이컵슨 미 국무부 중남미 담당 차관보가 전화통화를 하며 대사급 관계 복원 문제도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또 “쿠바나 밀수, 이민 문제 등에서 조금의 양보만 하면 미국은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다른 중남미 국가와의 관계도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지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