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서 ‘잊지말자 을사조약’ 캠페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기항 이준 열사 아카데미 원장. 오른쪽은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 1907년 7월 당시 ‘드 용’(De Jong)호텔이었다. [사진 이동춘]

“독립운동을 하시던 이준 열사가 돌아가신 이곳(네덜란드 헤이그)에 살면서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헤이그시에서 부인 송창주(74)씨와 함께 이준(1859~1907) 열사 기념관, 이준 열사 아카데미를 운영 중인 이기항(76)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잊지말자 을사조약(Never Forget, Never Again!)’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일본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 방침을 밝힌 직후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박탈한 을사조약을 상기하자는 차원에서다. 특히 고종의 특사로 을사조약의 강압성을 폭로하기 위해 헤이그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 열사가 순국한 호텔(현재 이준 열사 기념관)이 국제사법재판소 인근에 있어, “뭐라도 행동해야 했다”고 한다.

 “영국은 매년 11월이 되면 붉은 양귀비 꽃 배지와 상징물을 만들어 1차 세계대전 패전을 잊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입니다. 저는 에델바이스 꽃으로 배지를 만들어 캠페인을 시작했어요. 100년이 지난 역사이지만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그 과거를 분명히 기억해야 하잖습니까. 기념관을 찾는 방문객, 해외동포들에게 나눠주며 동참을 유도하고 있어요.”

 에델바이스를 캠페인 꽃으로 정한 건 물망초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란다. 물망초 꽃말은 ‘나를 잊지 말라’(forget me not)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무역확대 정책으로 세워진 한국수출진흥주식회사에 입사한 이씨는 72년 인삼차를 유럽에 팔기 위해 물류 중심지 헤이그에 파견됐다. 3년 뒤엔 회사를 그만두고 무역업을 시작했다.

그러다 92년 네덜란드의 일간 NRC(Het NRC Handelsblad)가 이준 열사의 순국일인 7월 14일 게재한 특집 기사를 보곤 삶의 방향을 틀었다. 다음 날부터 이준 열사 흔적 찾기에 나섰다. 암스테르담에서 살던 그는 헤이그로 차를 몰았다. 수소문 끝에 이 열사가 순국한 호텔을 찾았다. 폐허 수준이었다.

 “3층짜리 건물인데 1층은 당구장이었고, 2층과 3층은 노숙자들이 머무는 수준의 살림집이었어요. 집주인이 관리를 너무 안 해서인지, 소유권은 헤이그시로 넘어간 상황이었어요. 헤이그시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이듬해 20만 달러에 구입했습니다.”

 1620년에 지어진 건물을 수리해 95년 8월 5일 이준 열사 기념관을 개관했다. 이때부터 부부는 사업도 접고 이준 열사 관련 자료 수집과 기념관 운영에 올인했다. 지금도 거주지인 암스테르담에서 헤이그까지 5~6시간이 걸려 출퇴근하고 있다. 2008년엔 1억2000만원(헤이그시에서 절반은 부담)을 주고 당구장을 내보냈다. 최근 국가보훈처가 1억7000만원을 지원해 수리를 하고 있다. 20여 년 사이 헤이그시에선 ‘20대 명소’에 들 만큼 명소가 됐다.

이씨는 이준 열사의 사인(死因)도 밝혀내겠다고 한다. 할복 자결한 게 아니라 일제가 암살했다는 등의 주장 등을 규명하겠다는 거다. “이준 열사의 사망 확인서에 할복했다는 내용은 없어요. 자결했다면 만국평화회의장에서 했겠지요. 호텔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건 이상하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암살 가능성은 있습니다.”

 5일 KBS가 주는 해외동포상 수상을 위해 방한한 그는 “유럽 내 유일한 독립운동지인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을 운영하며 남은 일생 이준 열사를 기리는 일에 진력하겠다”고 말한다.

정용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