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에 간판내린 평화은행…'한빛은행'에 합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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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서울 역삼동 평화은행 회의실. 임시 주주총회를 위해 정부 대표와 임원들이 모였다. 은행부문을 한빛은행에 합병시키고 카드부문은 우리카드사로 독립시키는 안건을 승인했다.

'노동자 은행'을 내세우며 올린 간판을 출범 8년 만에 내리는 순간이었다. 평화은행의 역사는 1987년 대통령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노동계 표를 의식, 노동자 전담 금융기관을 세우겠다고 공약했다.

이것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다음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92년 11월. 정부가 목표한 자본금 3천억원 중 일반 근로자의 참여가 부족해 결국 일부 대기업으로부터 출연을 받아 출범했다.

이런 태생적 한계를 가진 탓에 근로자 은행이라기보다 14번째 시중은행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래도 평화은행은 출범 초기 직장인을 상대로 한 소매금융에 치중해 '은행 문턱을 낮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대동.동화은행보다 실적도 좋았다.

하지만 대기업 여신이 늘어나면서 위기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지적이다. 출범 때부터 평화은행에 몸담아온 한 직원은 "시중은행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해 어느 정도 기업 대출을 하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결국 외환위기를 거치며 기업 여신이 부실화하면서 휘청거렸고 합병설에 휘말렸다.

당시 '근로자 은행은 없앨 수 없다'는 노동계의 측면지원을 받아 1천2백억원의 공적자금을 수혈받아 기사회생하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대우사태의 직격탄을 맞아 2차 금융 구조조정에서 자본금을 완전 감자(減資)당하고 정부 주도 금융지주사에 통합되는 운명에 처했다.

게다가 올 초 고려산업개발 부도와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에 휘말리며 우리금융에 편입된 4개 은행 중 유일하게 정부와 맺은 경영개선약정을 지키지 못해 진통 끝에 간판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합병은 연말까지 완료되지만 당분간 평화은행의 각 지점은 유지될 전망이다.

우선 독립사업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산 통합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평화은행 고객이 한빛은행에서 거래하는 것도 당장은 어렵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아직 통합 일정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독립 카드사도 연내에 설립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다. 평화은행은 이날 주총에서 카드사 대표를 선임하는 안건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공적자금을 추가로 받기 위해 서둘러 우선 합병부터 한 것이다.

어쨌든 평화은행의 조기 해체는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우리금융 소속 금융기관들의 업무 재편을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금융계는 보고 있다.

최현철 기자 chd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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