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채록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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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호 28면

데이브 아이세이가 창안한 ‘스토리코어’는 소통 부재의 시대에 사회 통합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토리코어 / Harvey Wang]

지난해 7월 4일 늦은 밤,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한 남성이 오디오 플레이어에 CD 한 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스피커에선 곧 조곤조곤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세상 바꾸는 체인지 메이커(change maker) ① 구술 기록 프로젝트 '스토리코어' 창안자 데이브 아이세이

석 달 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그 CD는 스토리코어(StoryCorps)의 첫 번째 녹음 기록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 CD를 들으며 되새겼죠. 나는 왜 스토리코어를 시작했는가. 누군가의 목소리엔 그의 영혼이 담겨 있음을 절감하며….”

남자의 이름은 데이브 아이세이(Dave Isay·47), 미국의 구술 기록 프로젝트인 비영리 재단 스토리코어 창안자다. 전직 라디오 프로듀서이자 유명 오디오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는 2003년 기상천외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뉴욕에서도 가장 번잡한 곳 중 하나인 그랜드 센트럴역에 자그마한 녹음 부스를 설치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가 마주 앉아 40분간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채집한 몇몇 사연이 미국공영라디오방송(NPR)을 타자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다.

NPR은 아예 이를 정규 프로그램화했다. 매주 금요일 아침 미 전역에 방송한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이 대화를 담은 CD들을 영구 소장하고 있다. 이 도서관의 디렉터 페기 벌거는 스토리코어를 “역사의 뼈대에 살을 입히는 놀라운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몇몇 대도시에 있는 고정 부스 외에 중고 버스를 개조한 이동 부스가 전국 곳곳을 누빈다. 이미 10만여 명이 어머니 자궁처럼 어둡고 아늑한 공간에서 평생 가슴에 담아둔 절절한 사연을 토해냈다. 부스 안에 눈물을 닦기 위한 티슈가 항상 비치돼 있는 이유다.

“역사의 뼈대에 살을 입히는 작업”
대화 커플 중에는 가족이 압도적으로 많다. 자주 보지만 쑥스러워, PC와 스마트폰에 매몰돼, 혹은 그저 먹고사느라 바빠 얘기다운 얘기를 못해본 이들이 대부분이다. 처음 부스에 들어설 때의 서먹함은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서로의 존재에 집중하는 동안 스르르 사라진다. 그 자리를 메우는 건 눈물과 웃음,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말들이다.

아이세이는 ‘사람에겐 누구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름 없는 보통 사람의 삶에도 보석 같은 순간은 있으며, 그 이야기들에 마음을 여는 것만으로도 미국이 보다 나은 나라가 될 것이란 확신이다. 특히 저소득층, 성 소수자, 인종차별 피해자, 전과자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기울인다. “녹음한다는 건 그들의 삶이 중요하며 모두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고 강조한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보통 사람의 이야기란 ‘실’로 미국 역사라는 거대한 직물을 새로 짜려 한다. 스토리코어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화적 사건”(작가 알렉스 코트로위츠)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그 뒤에는 아이세이의 남다른 삶이 있다.

그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와 역시 지식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의대에 다니던 시절 그는 우연히 재활 중인 두 마약중독자를 만난다. 그들을 도우려고 직접 제작한 오디오 다큐멘터리가 우연히 지역 방송국의 전파를 타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미련 없이 의대를 그만둔 그는 오디오 저널리스트가 됐다. 그즈음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인 리처드 아이세이 박사가 게이였던 것이다.

이전부터 리처드는 동성애자에 대한 정신의학계의 편견에 맞서 외로운 투쟁을 벌여왔었다. 그 자신이 ‘정상적인 남자의 삶’을 살고자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았지만 성적 취향은 치료 대상이 아님을 깨달은 터였다. 결혼 10여 년 만에 아내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으나 둘은 10년을 더 살았다.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마침내 아버지가 커밍아웃하자 아이세이는 남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스톤월을 기억하며’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이다. 동성애 인권운동의 촉매가 된 스톤월 사건을 다뤘다. 아이세이는 뉴욕 지역매체 NY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었어요. 일생에 걸친 그의 투쟁을 알게 되면서 주류 바깥의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고 싶어졌죠. 부당하게 다뤄진 그들의 삶은 조명받아야 하며, 자기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그건 내게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은 날 밤, 그가 새삼 스토리코어의 첫 CD를 꺼내든 것도 그 때문이리라.

실제 스토리코어를 통해 알려진 이야기에는 지혜와 영감, 감동이 공존한다. 베버리는 9·11 테러 때 희생당한 남편 센과의 마지막 통화를 기억한다. 남편은 그녀에게 “당신은 끝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베버리는 천장이 무너지고 남편의 마지막 숨이 잦아드는 소리를 들으며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미친 듯 불렀다. 그녀는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고통이나 두려움이 아닌 용기, 자기희생, 무엇보다 사랑입니다.”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표현”
1968년 보비와 샌디는 막 입대한 19세의 신참 여군이었다. 둘은 사랑에 빠졌지만 누구에게도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몇 년 뒤 둘은 짧은 휴가를 받아 애틀랜타의 싸구려 모텔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이 법이 인정하는 정식 부부가 된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더 지난 뒤였다. 보비는 말한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기 위해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기도 한답니다.”

퇴역 해군인 샘은 손자 에즈러에게 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을 말한다. 워싱턴DC의 영화관에 들어가려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기억이다. “매표원은 내게 표를 팔 수 없다고 했어. 내 검은 손을 보고 판매를 거부한 거야. 그녀의 화난 얼굴 위로 (민주주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이 비치더구나. 그날 나는 밤새 울며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단다.”

모바일 혁명과 함께 스토리코어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많은 이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스토리코어를 만난다. 2008년부터는 ‘경청의 날(National Day of Listening)’이라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추수감사절 이후 첫 금요일, 사랑하는 이와의 대화를 녹음해 전용 사이트에 올리는 방식이다. 아이세이는 거듭 말한다.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표현입니다(Listening is an act of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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