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를 하는 부랑자의 냉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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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선, “제발 이 소설 좀 읽어 보세요. 정말 끝내준다구요.” 같은 말로 리뷰 전체를 도배해 버리고 싶지만 공정하지 못한 행동 같아 관두기로 한다. 하지만 찰스 부코우스키의 소설집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바다출판사)는 애시당초 ‘공정’이란 말과는 거리가 먼 책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나 이야기들은 이런 저런 객관적 준거를 들이대며 평가하기엔 너무나 살아있고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말하자면 순수한 날것 그 자체다.

소설이 이토록 싱싱하게 살아있는 이유는 아마도 찰스 부코우스키의 삶이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불안정한 우체국 하급 노동자, 시급 노동자 생활을 전전했으며 평생 알코올과 섹스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모든 억압과 기존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했다.

부코우스키는 스스로를 ‘펑크’, ‘멸종된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라 칭했고 프랑스 작가 장 주네는 그를 두고 ‘미국 최고의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정작 미국의 주류 문단은 그를 쓰레기 취급했다. 사실, 그의 소설이 쓰레기와 많이 닮긴 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 문단이 ‘쓰레기’라고 부르는 의미와는 약간 다르다. 다음은 그 몇가지 증거들.

섹스
부코우스키 소설에서 섹스는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 행동이다. 그만큼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어디에서나 섹스를 생각한다. 그의 소설에서 섹스는 이야기의 맛을 돋우는 감미료가 아니라 이야기의 주재료다. ‘10번의 사정’이나 ‘치킨 세 마리’, ‘세 여자’, ‘15센티미터’등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섹스가 곧 이야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부코우스키에게 섹스란 곧 커뮤니케이션이며 이 더러운 세상을 피해 자신의 힘을 소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다.

부랑자
너저분한 옷차림에 못생긴 얼굴, 일을 싫어하는 주인공들은 영락없는 부랑자의 모습이다. 주인공들의 모습은 부코우스키를 그대로 닮았고 실제 주인공의 이름이 부코우스키인 자전적 이야기들이 많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희망은 잃지 않는다. 아니 잃지 않는다기 보다 그에겐 희망이 선천적으로 몸 속에 탑재돼 있는 듯하다. 그 희망은 세계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일상에 대한 희망이다. 섹스하고 먹고 마시고 자위하고 햇볕을 쬐는, 그런.

그들은 내게 말했다. 더 있다 가. 여긴 좋은 곳이잖아. 그 어떤 곳보다도 훨씬 좋을지도 몰라. … 또 혼자가 되었다. 아무도 성가시게 구는 사람은 없다. 그대로 계속 걸어가 프랑스인 거리를 빠져나왔다.

… 어디를 향해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도중에 왼편 건물의 현관에 서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어이, 선생. 일자리 필요 없어?”… “아니 일은 필요 없어.” 대답한 뒤, 태양을 쳐다보며 걷기 시작했다. 나에게 74센트가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태양이었다. (「사랑스러운 연애 사건」)

냉소
그의 소설에는 풍요로운 미국에 대한 냉소가 곳곳에 숨어있다. 부코우스키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나 가족, 명예, 노동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섹스나 자위행위를 하거나 술을 먹는 것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미국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젊은이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이기기 위해 그는 소설을 쓰고 시를 썼다.

“왜 군대는 가지 않죠?”“도망쳐 버렸어요.”“거짓말이죠?”“좋을 대로 생각하세요.”“전쟁에 참가하고 싶지 않으세요.”“싫습니다.”“진주만이 공격당했어요.”“알고 있습니다.”“아돌프 히틀러를 때려눕히고 싶지 않으세요?”“글세, 별론데요. 누군가가 해주면 좋겠지만.”“겁쟁이.”“맞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싫은 게 아니에요. 막사에서 잔다는 게 싫습니다. 코를 드르렁거리는 녀석들과 함께 자야 하고, 어떤 멍청한 자식이 부는 기상 나팔 소리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끔찍한 일입니다.”(「텍사스의 창녀촌))

부코우스키의 냉소적인 정치관은 그가 좋아하는 인물과 싫어하는 인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단편 「기력조정기」에서 그는 체 게바라, 말콤 엑스, 카스트로, 고흐, 바이런의 팬이라 밝히고 조지 워싱턴, 닉슨, 시나트라, CIA에 경멸의 눈초리를 보낸다. 체제의 붕괴를 위해 노력한 자들에 대한 존경이야말로 찰스 부코우스키의 문학관이자 정치관이었던 것이다.

부조리한 세계를 향한 경고장
그렇지만 어떤 도움말로도 찰스 부코우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이자 우리가 그 쓰레기 안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만화경과도 같다. 이런 식의 쓰레기라면 정말 멋지지 않은가? 부코우스키는 1994년 4월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지만 이제 ‘20세기의 위대한 언더그라운드’작가로 부활하고 있다. 그의 죽음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경고장과 같은 것이었다. 다음의 문장처럼.

“독자 여러분이 허락해준다면 앞으로도 나는 창녀들, 경마, 술과 함께 세월을 보내련다. 그래서 맞이하게 되는 죽음은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단어로 치장된 그 어떤 죽음보다도, 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내가 볼 때는 성실한 것이다…….”(「정치만큼 지저분한 것은 없다)) (김중혁/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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