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리얼리즘을 개척하다, 영화 '꽃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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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영화엔 주목할만한 작업이 여럿 있었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나비', 그리고 '꽃섬'에 이르기까지. 혹자들은 이 영화들이 뛰어난 수작임에도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했다고 단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별 영화 작품들이 관객과 만나고 소통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영화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이나 소통 내용 외에, 숫자적 통계가 영화의 질을 대신하는 것이라 믿진 않는다. 일견 어려워 보이는 영화가 소수의 관객에게만 호감을 주는 건, 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보다 영화문화가 발전한 서구에서도 이런 일은 흔하니까. 문제는 소수의 매니아, 소수의 관객들이라 할지라도 정당하고 소중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공간, 문화적 시스템 아닐까?


혹시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지나치게 뻔한 수식어를 쓰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영화 '꽃섬'은 올해 만났던 한국영화 중에서 최고 수준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송일곤 감독은 단편 시절부터 국내 영화계, 평단의 관심을 끌던 연출자였다. '광대들의 꿈'에서 '간과 감자' '소풍' 등 그가 만든 단편영화는 인본적 주제의식, 그리고 영화 형식에 대한 연출자의 관심을 읽을수 있는 것들이었다. '꽃섬'은 송일곤 감독이 만든 첫 번째 장편영화다.

영화 '꽃섬'은 로드무비다. 아마도 영화를 보는 이는 이전 한국영화의 기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삼포가는 길'이나 '이어도' 같은, 이만희 감독이나 김기영 감독 영화를 연상케하는 구석이 있다. 스산하면서 처연한 여정의 기록, 그리고 그 속에 간직된 원형적 모티브들은 '꽃섬'에 신비한 후광을 입힌다.

십대소녀 혜나는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찾기 위해 남해행 버스를 탄다. 거기서 혜나는 30대 중반의 여성 옥남을 만난다. 버스 기사는 옥남과 혜나를 인적 드문 산골짜기에 버려두고 떠나고 두 여성은 유진을 우연하게 마주친다. 그녀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혜나 등은 유진을 다시 살수 있게끔 도와준다. 세 여자는 이제 모든 슬픔을 잊게 해준다는 꽃섬을 향해 떠난다. 꽃섬으로 가는 여행길에서 이들은 여러 인물 군상과 마주치고 어느새 여정의 끝이 가까워짐을 감지한다.

"최근 생덱쥐베리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감동적인 부분이 있었다. 친구가 아파하면 위로해주는 정도로 방관하지 말고 다가가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낫도록 하라는 거다" 송일곤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견해를 밝혔다. '꽃섬'은 디지털 영화의 매력, 그리고 인본적인 주제의식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작업이다. 영화는 다큐멘터리를 연상케하듯 인물들 독백과 대사, 그리고 혜나라는 여성이 찍는 디지털 카메라 화면을 그대로 교차시킨다. 꽃섬이라는 미지의 공간을 찾는 세사람의 여정은 기실 진부한 감도 있지만 송일곤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현장성과 새로운 희망을 찾는 여성들의 드라마에 조화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고통을 겪고, 망각을 갈망하며 새로운 내일을 찾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디지털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재현된다.

최근 한국영화에 일상의 리얼리즘이 하나의 흐름처럼 번져있다면, '꽃섬'은 이를 뒤집는 모험을 감행한다. 영화는 추상적인 형태로, 상실의 여정을 떠난 여성들 심리와 그들 영혼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인다. 섬에 도착한 여성들은 마법과 헤어짐을 경험한 뒤, 새로운 꿈을 가슴속에 간직한다. 마치 그들은 기묘한 마법의 '순간' 이후 세상에 다시 태어난 아이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건 영화 '꽃섬'이 단순한 치유의 영화를 넘어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를 탐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영혼의 형태를 포착한 리얼리즘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감동적이면서, 보는 이의 혼의 한자락을 슬그머니 잡아채고야 만다.

배우들 연기도 빼어난 영화 '꽃섬'에 대해 프랑스 르몽드지는 "젊은 작가의 감수성이 만들어낸 서정적이고 희망적인 노래"라고 평했다. 그 평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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