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물음에 대답해볼래? 절대로 남이 한 말을 빌려오면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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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극 무대에 선 피노키오는 다른 인형과 달리 스스로 움직이고 노래해 무대를 엉망으로 만든다. 하지만 극단 단장인 스트롬볼리가 보기에 피노키오는 꽤나 쓸 만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피노키오를 무대에 세우려고 새장 속에 가둔다. 불쌍한 피노키오! 이 때 원작과 달리 제빼또 할아버지가 피노키오를 구출하고 단장을 법원에 기소했다고 하자. 이 때 단장을 어떤 죄목으로 기소해야 할까? 이건 꽤나 골치 아픈 문제다. 과연 단장을 ‘감금죄’ 또는 ‘어린이 유괴죄’로 기소해야 할까, 아니면 ‘절도죄’로 기소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골치 아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철학에 빠진 피노키오의 모험
이처럼 엉뚱하고도 재미있는 철학 이야기를 담은 철학자 양운덕 씨(41)의 ‘피노키오의 철학’(전4권, 창작과비평사) 시리즈는 일상의 문제들을 통해 깊이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피노키오의 철학’은 제1권 『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 제2권 『아킬레스는 왜 거북을 이길 수 없을까?』, 제3권 『비트겐슈타인은 왜 말놀이판에 나섰을까?』, 제4권 『라쁠라스의 악마는 무엇을 몰랐을까?』 등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됐다.

현재는 이 중 앞의 두 권만 먼저 출간된 상태다. 각 권은 흥미로운 질문을 통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등 핵심적인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탐색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 철학사를 시대별로 조망한 교과서류의 책은 아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책은 올바른 질문을 찾아내는 데 주력한다.

글을 쓴 양운덕 씨는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뒤, 철학과 대학원에서 헤겔을 중심으로 한 사회철학을 공부했으며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등을 중심으로 한 현대 유럽철학의 다양한 사조와 변증법적 사고에 관심을 키워왔다.

그는 철학을 어렵게만 여기는 일반인들에게 철학으로 들어가는 문을 안내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한국에서는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쉬운 철학입문서이며 그 사정은 외국으로 시야를 넓힌다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일단 전체 주제를 11개로 나눴어요. 저는 대학 초년생이나 고등학생 정도를 대상으로 11개의 단편소설을 쓴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주겠다는 생각보다는 생각하는 과정을 스스로 알아갈 수 있게 구성했죠. 말하자면 답 없는 철학 책, 철학 없는 철학 책입니다. 질문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시리즈가 던지는 질문은 다양하다. ‘외계생명체를 죽이면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세상의 모든 까마귀는 검은가?’, ‘삼각형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수리한 희망호는 원래의 희망호와 같은가?’, ‘이 칠판은 무슨 색일까?’ 등 언뜻 듣기에는 금방 답을 알 수 있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답은 진짜 답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독자들은 점점 서양 철학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저는 철학자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으로 보고 싶습니다. 독자들도 각자의 문제를 통해 각자의 해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그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해답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죠. 누구나 알기 쉬운 말로 철학을 잘 설명한 책인만큼, 철학자들을 라이벌로 삼아 해답을 찾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죠.”

이 시리즈는 또한 ‘우리말로 철학하기’의 일환으로도 보인다. 물론 입문서이긴 하지만 평이하고 일상적인 단어로 칸트와 헤겔에 접근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또 철학에서 금지된 예화를 든 것도 색다르다.

그러니까 양운덕 씨는 ‘그들만의 학문’인 철학을 일상의 자리로 끌어내리기 위해 이 책을 쓴 셈이다. 서양철학은 결코 도 닦는 학문이 아니라 보통 정도의 지적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민주적인 학문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들만의 학문? NO! 나만의 대답? YES!
양운덕 씨는 현재 몇 개의 강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에 할애한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만큼 앞으로 양운덕 씨가 선보일 철학 책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철학의 일상화 작업과 병행해서 칸트급의 본격 저술을 쓰는 것도 그의 목표 중 하나다. 칸트는 60세(1781년)에 이르러 비로소 『순수이성비판』을 펴냈으니 그에게도 아직 시간은 많이 남은 셈이다. 그렇다면 양운덕 씨만의 질문은 과연 무엇일까?

“시간의 문제예요. 한 10여 년이 지나면 책으로 묶을 수 있을까 몰라요. 그러니까 변화의 문제죠. 변화의 철학.”

1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면 곧 출간되리라는, 철학과 문학간의 상관관계를 다룬 책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김연수/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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