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학 박사 된 퇴계 17대 종손 “운명인가 봐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다음달 25일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퇴계(退溪) 철학의 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는 이치억(37·사진)씨. 그는 퇴계 이황의 17대 종손이다. 450여년 전 선조의 학문을 연구해온 이씨는 21일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것은 숙명과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인근 종가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유학 공부에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집안 가풍이 엄한 편이었어요. 집에 혼자 있을 때도 다리를 쭉 뻗지 말고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등 엄한 교육을 받았죠. 어릴 때는 종손에 대해 반항적인 생각을 갖기도 했어요.”

종가의 하루는 사당 참배로 시작됐다. 그의 할아버지인 고(故) 이동은 선생은 아침 식사 전 의관을 완벽히 갖추고 조상께 인사를 드렸다. “살면서 인간 ‘이치억’보다 퇴계 이황 선생의 17대 종손으로서 문중을 대표하는 일이 더 중요해 질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는 집안 가풍을 벗어나고자 고교를 졸업한 1994년 일본 메지로(目白)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도피하듯 간 곳에서 아시아지역 문화를 공부하면서 자신이 유교 문화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제가 퇴계 이황의 17대 종손이라는 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귀국 후 이씨는 성균관대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퇴계 선생이 입학해 대사성(大司成· 정3품·현 대학총장)을 지낸 곳이었다. 2002년 이 대학 유학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과정을 밟았다. 2005년부터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 퇴계 선생의 주리 철학을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결정한 것은 2009년이었다. 아버지 이근필(82)씨는 아들이 퇴계 선생의 학문을 논문 주제로 정하자 선조의 학문을 비판할 수 있다며 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논문은 주리철학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이었고, 이를 이해한 아버지도 논문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퇴계 선생의 주리철학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타고나기를 좋은 사람으로 태어났고 따라서 누구나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성인이다. 이씨는 “유학은 평생 공부해도 끝이 나지 않는 공부”라며 “평생 할 일을 남겨주신 선조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