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아, 거울아, 네가 비추는 것이 내 얼굴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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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1년 초 이단과 간통으로 체포돼 기소된 베아트리스드 플라니솔의 재판기록에 특이한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여인의 물품 중에서 주술을 위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물건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자기 것임을 인정하였다. 탯줄 두 개, 생리혈이 묻은 천, 향, 거울 한 개, 아마 천에 쌓인 작은 칼 한 개, 주문을 적은 종이…….’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 많지만 거울이 마녀의 물증이란 점은 더구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사제들은 거울이 마녀의 도구라 그 안에 악령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에게 거울은 ‘광기의 시선’을 잡아끄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거울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정으로 들어온 것은 18세기부터였다.

19세기에는 거울 달린 옷장도 등장한다. 이렇듯 거울의 역사는 문명의 발전을 가늠케 하는 척도다. 사빈 멜쉬오르 보네의 《거울의 역사》(윤진 옮김, 에코리브르)는 그간 거울이 거쳐온 드라마틱한 길을 소재로 삼았다.

인간에게 거울은 어떤 존재인가
책의 앞부분은 ‘거울의 역사’를 다뤘다. 초기의 거울과 금속의 사용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진 유리 거울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보네는 다양한 문헌에서 거울 이야기를 뽑아낸다. 왕립 거울제조소에서 있었던 산업스파이 이야기와 프랑스 파리에서 거울이 대유행한 이야기는 박물학적인 서술로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하지만 거울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무엇보다 자기 얼굴이 그대로 투영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좌우가 바뀌긴 하지만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획기적인 일이었다.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낳은 변화는 실로 엄청났다.

책의 2, 3부는 인간에게 거울은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는데,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서로 맞물려 있는 것도 꽤 흥미롭다. ‘신은 완전한 거울’이라며 거울의 이미지를 신성시했던 때가 있었던가 하면 ‘거울은 사치의 상징’이라며 거울의 환상성을 지적한 철학자도 많았다. 사진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거울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다.

“나는 나의 상이 언제나 변화하는 나의 자아와 일치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다. 상은 무겁고 부동이며 고집스럽다(이것은 우리 사회가 상에 의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가볍고 분열되고 흩어져 있다.

사회에 의해 동일시의 힘을 부여받는 이 반사상은 결국 피 흘리는 상처에 지나지 않으며, 말하자면 자아의 천박한 포장, 의식의 완전한 자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속박일 뿐이다. 나에 대해 외면화된 상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두렵다.”

거울 뒤에 숨은 비밀
말하자면, 거울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검증도구로 존재한다. 객관적이라는 폭력이 주관적인 ‘나’를 지배한다. “이미지와 반사상이 많을수록, 비밀은 더욱 깊은 곳에 숨을 것이다.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은 더욱 뒤로 물러나며, 거울 안에는 언제나 그 안에 있지 않은 것이 머물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은 거울의 숨은 마력, 혹은 유혹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목이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마치 거울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거울은 마치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법의 거울처럼 우리에게 답변하는 듯하다.

디지털 복제, 영화 같은 ‘허상으로서의 거울’이 난무하는 요즘 ‘거울’에 대한 문제제기는 굉장히 시의적절한 주제가 아닌가 싶다. ‘나는 누구이며 내 객관적 이미지는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거울의 역사》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런 질문과 함께 말이다. ‘거울아, 거울아, 네가 비추고 있는 그 얼굴이 정말 내 얼굴이니?’ (김중혁/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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