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심의권의 당략적 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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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어제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제1회 추경예산안의 규모를 11억5천만원 삭감하고 통과시켰다. 그리고 국회는 오늘과 내일 중으로 지보 동의안을 안건별로 심의처리하고 9일 예정대로 회기를 마치리라 한다.
과반 국회에서 재경위나 예결위가 추경안을 다루는데 있어서 날치기통과, 환장변칙통과 등을 자행하여 여·야간에 격심한 대립을 자아냈던 것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그러나 이번 임시국회는 상당한 냉각기를 두고 개회했고, 또 추경예산안의 본회의 상정에 앞서 여·야간에 합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소란스러운 사태를 조성치 않고 추예안을 통과시켰다. 이 점은 다행이라 하겠으되 국회가 추경예산안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묵과치 못할 점이 두 가지 있으니 국회예산심의권의 올바른 행사를 위하여 여기 지적해 두기로 한다.
그 하나는 국회예산심의권이 다분히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것으로 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과반 임시국회도, 금 차의 임시국회도 회기를 짧게 설정하고 예산심의 대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으므로 국회가 예산심의를 성실히 하려야 할만한 조건이 없었다. 분과위별 심의가 심히 소홀하여 모처럼 성숙되어 가던 분과위원회 중심주의가 다시 고개를 수그리기 시작했으며, 예결위는 예산수정권을 특별소위에 맡김으로써 예산을 심의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리하여 국회의 예산심의는 예산심의가 아니라 행정부가 내놓은 안을 덮어놓고 승인하거나 혹은 이미 써버린 예산의 결산승인으로 타하고 말았는데 만약에 앞으로 이런 폐 풍이 지속한다고 하면 국회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그들은 여·야가 협상을 가지고 본회의상정에 앞서 이견을 조종하는 것은 좋으나 도대체 협상에 의해서 합의에 도달하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이번 추경예산처리에 있어서 여·야는 세출 세입 면에 있어서 공히 11억5천만원을 삭감하였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거기에 어떤 뚜렷한 정책적 원칙이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엄밀히 따진다면 이번 여·야의 합의는 서로들 대립되고 있는 당리당략을 조정하고 여·야로 하여금 각기 정치적인 체면을 세우게 하는 것을 위주로 했을 따름 세출 면의 삭감에 있어서도, 세입 면의 삭감에 있어서도 신중한 정책상 고려가 결여되어있다. 이처럼 여·야 협상이 국리민복의 구현을 추구하지 않고 주로 당리당략의 고집에서 나오는 극한투쟁회피만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하면 국회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이 아니라 정당대표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상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정부와 국회와 정당의 맹성을 촉구하고 싶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국회는 지보안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케이스·바이·케이스」의 심의를 원칙으로 하되 「계약된 것』부터 처리할 방침이라 한다. 총액 1억3천만「달러」에 달하는 방대한 액수의 지불보증 동의안을 불과 며칠 안에 처리한다는 것은 대단히 무리스러운 요구이다. 그뿐더러 상업차관 가운데는 사업의 계획도 업자의 신용조사도 기술적인 능력도 면밀히 조사치 않고 지보 동의부터 요구하고 있는 것도 있으니 정부가 지보를 주는 의미는 무엇이며 또 국회가 지보에 대해서 동의를 주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부터 의문시된다.
총체적으로 말해 우리 국회는 극한대립, 여·야 협상 등의 되풀이로 중요안건을 심의하고 처리하는데 사실상 소비할 수 있는 시간과 정력을 스스로 축소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국회가 이런 경향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안건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심중히 다루어주기를 요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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