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워싱턴 활용설명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김석한
미국 워싱턴 애킨검프 법률회사
시니어 파트너

지난 수십 년간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엄청나게 커졌다. 하지만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은 그에 걸맞은 지위를 아직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첫째, 워싱턴의 하위문화, 즉 행정부 관리들의 행태·습성 또는 사고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2008년 촛불시위 때가 좋은 예다. 당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한국에 양보할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주로 미 무역대표부(USTR)의 고지식한 실무자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는 동안 몇 주일이 흘렀고, 시위는 계속 거칠어졌다.

 그때 한국이 들이밀어야 했던 것은 국제조약의 일반적 조항인 ‘불가항력적 상황’이다. 이에 따르면 조약의 한 당사자는 예측·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근거로 이미 맺은 합의를 변경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사태 내내 거의 마비상태였으므로 이를 불가항력적 상황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한국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30개월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잠정 중단한다고 미국에 통보했어야 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교훈 삼아 워싱턴의 하위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워싱턴에서 원하는 것을 최대한 많이 얻어낼 수 있다.

 둘째, 미국 내 친한파의 급(級)이 썩 높지 않다. 한국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들이 워싱턴의 정책을 주무르는 최고위급에 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미 콘퍼런스나 세미나에 가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에선 나이 지긋하고 직급도 높은 분들이 오지만, 미국에선 중간 실무자나 아예 새파란 신출내기들도 나온다. 그런 장면 자체가 한국이 워싱턴에서 별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새로 출범할 박근혜 정부는 워싱턴에서 친한파들의 수준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셋째, 워싱턴을 움직일 로비력이 모자란다. 이 때문에 한국의 위상이 낮아지는데도 아직 로비력을 키우려는 투자는 부족하다. 로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전략을 잘 구사하는 나라들에 비해 한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도 미 의회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연방정부 관리들과는 달리 미 상·하원 의원들은 지역구의 다양한 이해를 대변한다. 지역에 따라선 한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한국으로 수출해 먹고 사는 기업이 많은 지역에서 특히 그렇다. 이런 상호 의존관계를 잘 활용하면 지역구 의원들을 한국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들을 통하면 미 의회를 설득하기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미 의회의 친한파 의원들은 연방정부에 대해서도 한국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대변해줄 수 있다. 미 의회의 여야뿐 아니라 기업, 비정부기구(NGO), 각종 이익단체에도 친한파가 고루 필요하다. 그래야 무슨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한국은 다양한 부문의 우호세력과 함께 대응할 수 있다. 이때 한국은 워싱턴에서 로비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을’ 의식이 문제다. 아무리 미국이 초강대국이라지만 한·미 관계는 갑을 관계가 아니다. 이젠 한국은 자신의 국제위상에 걸맞은 자의식을 지닐 때가 됐다. 예컨대 미국 관리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한국 정부가 과민반응하거나 언론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미국 관리들에게 만나 달라고 조르는 일도, 지나치게 중량급 인사를 주미대사로 보내는 것도 피해야 한다.

 위에서 지적한 네 가지는 미국 내에서 한국의 위상을 끌어내리는 요소들이다. 곧 출범할 박근혜 정부는 이를 하루빨리 개선해 한·미 동맹의 실익을 보다 효과적으로 얻어야 한다.

김 석 한 미국 워싱턴 애킨검프 법률회사 시니어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