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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나카소네 외교 배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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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손기섭
부산외대 교수·외교학과

1982년 11월 30일 밤 일본 나카소네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세지마 류조 이토추 고문을 총리 관저로 불러 특명을 내렸다. 비밀특사로 가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고. 당시 한·일 관계와 중·일 관계는 물론 미·일 관계조차 최악인 상태였다. 전임 스즈키 총리는 한·중·일 간 증폭된 역사교과서 갈등과 엔 차관 갈등을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미·일 동맹도 외면해 사임에 몰렸다. 반면 신임 총리 나카소네는 은밀하고도 신속히 움직였다.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정권의 실세였던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을 부산과 오사카를 오가며 비밀리에 만나 한·일 관계의 첨예한 갈등 사항을 전격적으로 타결시킨다. 한국의 안보경협 60억 달러 요청을 순수 경협 안건으로 조정해 한·일 40억 달러 경협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것이 주효해 나카소네 정권은 미국 레이건 정권과도 신뢰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고, 이후 미·일 정상은 서로 퍼스트네임을 부를 정도로 친밀했다. 중국 후야오방 공산당 총서기와도 ‘역사상 유례 없는 최상의 중·일 관계’를 회복시켰다. 그 근저에는 교과서 역사조항 기술에 한국과 중국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한다는 ‘근린 제국 조항’ 설정과, 엔 차관 경제협력이라는 나카소네 외교가 숨어 있었다.

 아베 일본 자민당호가 떴다. 아베 자민당은 지난 총선에서 ▶평화헌법을 개헌해 ‘재무장국가’가 되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현상 변경의 영토주권을 강화하고 ▶나아가 침략전쟁과 일본군위안부의 강제 동원성을 반성했던 90년대 초·중반의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폐기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정말 이러한 일을 일본이 자행한다면 한·중·일 간 평화는 물 건너가게 된다. 일본이 그동안 평화국가로서의 성과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우경적이고도 국수주의적인 ‘재무장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일본이 역사 반성을 망각하고 ‘재무장국가’가 되면 필연적으로 중·일 관계와 한·일 관계는 최악의 갈등에 놓이게 된다. 센카쿠열도와 독도에서 부딪치고 동중국해와 동해에서 해군력이 충돌하는 신냉전적 상황이 도래할지 모른다. 실제로 아베 총리는 김포공항에서 독도 방문 소동을 벌이고 역사 반성을 자학사관이라고 우기는 우경적 인물들인 신도, 이나다, 하쿠분 의원을 총무상과 행정개혁상 및 문부과학상에 입각시켜 매우 우려스럽다. 현해탄과 동북아 하늘에 그야말로 먹장구름이 드리워진 형세다.

 아베는 나카소네의 유연한 동아시아 외교해법을 배워야 한다. ‘재무장국가’로의 개헌을 중지하고 올바른 역사인식에 근거한 평화국가의 길을 갈 것을 선언해야 한다. 아베 자민당 정권이 ‘재무장국가’를 넘어 ‘핵무장국가’로 나아갈 위험성도 존재한다. 핵무장의 극우적 주장을 서슴지 않는 전 도쿄도지사 이시하라의 신당 ‘일본유신회’와 연합하면 중의원은 개헌 가능선인 3분의 2석을 훨씬 웃도는 348석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박근혜 민생정부, 일본에서는 아베 자민당 정권이라는 한·일 양국 공히 신정부가 출범하는 호기를 맞았다. 한·일 관계 개선의 절호의 찬스다. 신생 ‘박근혜 정부’는 무엇을 추진해야 할 것인가. 먼저 일본이 무리한 국수주의 정책을 추진하지 않도록 인수위 시점에 특사 파견 등 공식·비공식 외교라인을 총동원해 아베 정권의 외교 폭주를 막아야겠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폐기하지 않을 것과 일본의 독도 국제사법법원(ICJ) 제소 방지가 급선무다. 또한 통화 스와프협정 원상 복귀,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녹색 에너지밸리 공동 구상 등 경제외교의 상호 의존성 강화와 정치·경제 네트워크의 회복이 절실하다. 중장기적으로는 일본이 개헌을 통한 재무장국가가 되지 않도록 한·미·중 삼국이 관여외교를 펼쳐야 한다. 아베 정권은 나카소네의 유연한 평화외교로 이에 화답해야 할 것이다.

손 기 섭 부산외대 교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