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떴다 판교, 뜬다 세종, 역시 강남, 주춤 용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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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서울 봉천동에 사는 주부 서영임(53)씨는 얼마 전 동네 시장에 들렀다 은행을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시장 근처 상가 1층에 있었던 은행 지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씨는 “멀쩡하던 지점이 갑자기 문을 닫아 당황했다”며 “요즘 집값도 떨어지고 장사도 안 된다더니 은행도 경기를 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은행 지점을 보면 지역 경기가 보인다’.

 요즘 은행 관계자 사이에 도는 말이다. 돈이 몰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새 지점이 비집고 들어서고, 돈이 빠지는 지역에선 과감히 문을 닫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처럼 경기가 가라앉은 시기엔 이런 흥망성쇠가 더 확연히 드러난다. 최근 2년 사이엔 서울 강남, 부산 해운대, 세종시 등이 은행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본지가 이 기간 국내 4대 시중은행(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이 새로 문 연 지점 137곳과 문을 닫거나 합친 지점 56곳을 전수 분석한 결과다.

 집값은 떨어졌지만 은행권에선 여전히 ‘강남불패’의 신화가 건재했다. 2년간 서울 강남구에 새로 생긴 은행 지점만 6곳이다. 전국에서 지점이 가장 많이 들어선 지역이다. 그중 절반은 고액 자산가를 겨냥한 ‘프라이빗뱅킹(PB) 지점’. 신한은행이 신사동과 대치동에, 하나은행이 삼성동에 각각 문을 열었다.

 김성엽 하나은행 채널기획부장은 “부유층 고객이 밀집한 강남은 영원한 전략 지역”이라며 “부동산 시장이 시들한 것이 오히려 은행에는 호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투자가 불안해지자 ‘강남 부자’가 금융 상품을 활용한 재테크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부산 해운대구에 지점이 잇따라 들어선 것도 같은 이유다. 부산 최고급 주택단지인 마린시티를 중심으로 우동에만 우리(2곳)·하나·국민은행이 앞다퉈 지점을 냈다.

 역설적으로 가장 많은 은행 지점이 사라진 곳도 강남이었다. 출장소(직원수 10명 이내의 소형 지점)를 포함해 지점 4곳이 2년 새 이 지역에서 자취를 감췄다. 임대료가 워낙 비싸 웬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면 수지타산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서다. 김 부장은 “강남은 전국에서 지점의 부침이 가장 심한 곳 가운데 하나”라며 “임대료가 너무 비싼 지역에선 지점을 내는 대신 고객을 방문해 ‘찾아가는 재무서비스’를 펼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남구 다음으로 ‘뜨거운’ 지역은 경기 성남시다. 벤처 기업이 활발히 들어서고 있는 ‘판교 테크노밸리’ 덕분이다. ‘판교 에이치스퀘어’를 비롯한 대형 업무용 빌딩에 대부분의 은행이 한 곳 이상의 지점을 냈다. 판교뿐만이 아니다. 산업단지 출점은 전국적인 붐이다. 올해만 해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3곳), 경기 화성산업단지(3곳), 부산 유통단지(3곳)등 22곳의 산업·유통단지에 새 은행 지점이 들어섰다. 올 한 해 전국에 신설된 지점(72곳)의 30%가 산업단지에 생겼다. 이는 가계 대출 위축과 부동산 침체로 은행이 아파트 대신 아파트형 공장을 찾아 나서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김석군 국민은행 채널기획부 팀장은 “그간 산업단지는 수익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해 은행이 적극적으로 지점을 설립하지 않았다”며 “최근 산업단지 지점 설립은 성장성 높은 기업을 찾기 위한 은행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김 팀장은 “은행 사이에선 내년에도 주목할 지역으로 가산디지털단지, 인천 공업단지 등이 꼽힌다”며 “한 번씩 투자가 유치될 때면 뭉칫돈이 들어오는 데다 단지 내 업체가 늘면서 추가 수요가 꾸준히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부처가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한 세종시는 ‘황금 광산’으로 꼽힌다. ▶부처를 따라 이전하는 공공기관의 주거래 은행이 되면 거액의 기금을 관리할 수 있고 ▶대표적인 우량 고객으로 꼽히는 공무원도 신규 고객으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2년 사이 4개 은행이 사이 좋게 한 곳씩 새 지점을 열었다. 경기 김포·남양주·용인시 등 신도시 주변의 주택지구에도 출점 행렬은 지속됐다.

 이춘우 우리은행 점포개발부장은 “최근 몇 년 사이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큰 택지개발지구가 없었다”면서도 “사람이 모여 있는 주택지구는 은행의 가장 기본적인 텃밭”이라고 말했다.

 한때 ‘로또’로 불리며 출점 경쟁이 붙었던 서울 용산구는 힘이 한껏 빠진 모양새다. 올해에만 용산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등에 나가 있던 은행 출장소 3곳이 철수했다. 박상언 부동산컨설팅업체 유엔알컨설팅 대표는 “최근 역세권 개발 사업이 지연되며 용산 부동산 시장은 침체돼 있다”며 “부동산 거래가 끊기면서 인근 주민의 자금 상황도 악화되고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국민은행 김 팀장도 “현재 재개발 사업이 주춤하는 추세라 은행이 한시적으로 용산을 빠져나오고 있다”며 “본격적인 입주가 시작되면 다시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해마다 수많은 은행이 문을 열고 닫는 가운데 4대 은행의 지점 수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출장소를 포함한 전국 은행지점 수는 5년 전에 비해 50곳 정도 감소했다. 한 해 10곳 정도를 줄이고 있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흐름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본다. 은행의 수익이 갈수록 나빠지면서 지점 구조조정의 움직임이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16일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증권사가 추정한 4대 금융지주사(KB·우리·신한·하나금융지주)의 올해 순익 전망은 8조806억원으로 지난해보다 22.9% 줄었다.

 이병윤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저금리 기조가 계속되며 은행의 순이자마진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며 “은행이 파는 상품의 이익이 줄어들면 은행의 몸집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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