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비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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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시장이 경관들보고 새해에 일 잘하라는 훈시를 하다가 별안간에 신문에 대한 투정을 해서 만당의 갈채를 받았다는 것이 화제. 그러나 별로 대수로운 얘깃거리가 아니어서 신문「고십」난에 조그맣게 비쳤을 뿐이다. 신문이 잘한 일은 깔아 버리고, 잘못한 일만 대서특필한다는 생각은 윤 시장이 과거에도 여러 번 밝힌바 있어서 새로울 것이 없고, 윤 시장이 아니라도, 권력은 원래가 신문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자유와 민권의 기수요, 자신이 신문기자노릇을 한 적이 있었던 고 「케네디」대통령마저도 재직시 신문과의 관계가 썩 원만하진 않았다. 그의 비위에 크게 거슬린 특정신문구독을 정지시킨 일까지 있었다. 다만 「케네디」는 「케네디」였기에 보기 싫은 신문만 끊고 만나기 싫은 기자만 따돌렸지 신문전체를 밧다리 후리기로 메 끊진 않았다. 그러나 권력이 신문을 못마땅히 여기고 신문이 권력의 비위를 거스르기 쉬운 경향- 잘되고 잘사는 나라에서도 서로 마음을 허락하지 못하는 권력의 생리와 신문의 생리라는 것이 있다.
사실 일이 잘 되고 백성들의 유복하게 사는 나라일수록, 권력은 신문이라는 귀찮은 쉬파리의 시달림을 더 받아야 한다는데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있다. 그 반면 일이 안되고 민생이 노예의 처지를 면하지 못한 나라의 신문일수록 잘 못한 일은 모두 깔아버리고 「잘한다」, 「잘된다」. 「더 잘해라」하고 권력과의 짝사랑으로 시종하기 마련이다. 극단적인 경우, 공산국가나 왕시의 「나찌스」의 신문은 신문이 아니라 관보이기 때문에 권력과의 짝사랑정도도 못되고 숫제 권력의 자화자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국가의 신문은 사회의 목탁으로서의 본분이 있고, 또 개가 사람을 물어선 기사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어야 기사가 되는 격의 신문본래의 생리가 있다. 그러다가 빗나가는 수도 있다. 그러면 국법이 발동하고, 그러기 전에 금년도 IPI보고가 지적한 자체검열이라는 「브레이크」가 걸려있다. 병오년 초에 신문의 책임과 윤리를 강조하자. 그리고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는 「액튼」경의 명언을 아울러 되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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