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D 파일] '잔혹한 사랑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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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겨울 풍경 앞에 서보지 못한 이는 러시아 음악과 영화에 푹 빠져들기 힘들 것 같다.

일년 내내 푸른 여름 나라에 사는 이가 자작나무 숲에 내리는 눈과 볼가강을 오가는 석탄선, 그리고 시린 사랑의 비극을 실감할 수 있을까. 사계절을 누리는 우리야말로 세계 문화를 고루 내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정서를 갖고 있지 않은지 위안해본다.

제목과 재킷 그림만 보고 선뜻 집어든 DVD가 '잔혹한 사랑 이야기(A Cruel Romance)'(15세)다. 섬세한 얼굴선과 오똑한 콧날의 러시아 미인이 아련하게 그려진 재킷. 연기를 내뿜는 증기선, 회한에 찬 여성의 노래, 파도 소리와 그림들이 떠오르는 메뉴.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볼가 강변에 도착한 유람선과 집시 악단의 노래, 성장(盛裝)한 결혼식 하객들이 보인다. 그때 하얀 망토를 두른 건장한 사나이 세르게이(니키타 미할코프)가 백마를 탄 채 배에 뛰어들어 신부에게 꽃다발을 던진다. 이를 바라보는 라리사(라리사 구제예바)의 가슴은 마구 뛴다.

진흙탕 때문에 망설이는 라리사를 위해 세르게이가 마차를 번쩍 들어 옮겨 준다. 부유한 사업가 크누로프(알렉세이 페트렝코)와 라리사의 소꿉 친구인 보제파토프(빅토르 프로스쿠린)는 그를 "멋진 사나이"라고 칭찬한다. 라리사를 흠모하는 소심한 우체국 직원 카란디셰프(안드레이 마야코프)는 "왜 여자들은 착한 남자를 거들떠보지 않는지"라며 탄식한다.

'잔혹한 사랑 이야기'는 '도시를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아름다운 여인 라리사를 중심으로 네 남자의 사랑 싸움과 거래, 그로 인한 라리사의 죽음을 그린 비극이다. 몰락한 귀족 계급의 막내 딸로, 결혼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는 라리사.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떠오른 중산층 남자들은 그녀를 탐냈다가 버린다.

짧은 사랑의 행복과 긴 이별의 고통을 겪는 라리사의 내면은 덧없는 생을 노래하는 가사와 시적 영상으로 표현된다. 낙엽이 휘날리는 언덕을 하염없이 걷는 스카프 두른 여인의 모습을 본 게 얼마만인지.

감독 엘다르 라자노프는 "자본주의에 잠식돼가는 볼가강 연안의 산업 도시를 무대로 러시아인의 삶을 묘사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라자노프는 코미디에 재능이 많지만, '두 사람을 위한 정거장'(1982년)이나 '잔혹한 사랑 이야기'(84년)처럼 서정적인 작품에도 만만찮은 솜씨를 발휘한다.

부록으로는 촬영 현장, 감독과 배우에 대한 영문 자료, 원작자인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의 생애, 원작자에게 영감을 준 볼가강과 촬영지였던 코스트로마에 대한 다큐 등이 있다. 몸이 불은 아줌마가 된 주연 여배우가 "철없는 히피족이었던 스물네살에 찍은 데뷔작"이라고 회고하는 인터뷰는 쓸쓸한 뒷맛에 긴 여운을 더해준다.

옥선희 DVD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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