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17일 개봉 '시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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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영화 촬영 때 여배우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건다면? 1. 촬영장 어디나 사탕이 놓여 있어야 한다.

단, 체리맛은 절대 안된다. 2. 탈의실에는 간이 수영장이 있어야 한다. 3. 담배 세 갑을 항상 준비할 것. 그 중 하나는 개봉해 놓아야 한다.

거의 '마님' 수준이다. 감독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마당쇠'인지 감독인지 헷갈릴 만 하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선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은 듯하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틴 스코시즈가 아닌 다음에야 대개 스타들의 까탈스러운 비위를 맞춰야 순탄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게 현실인 모양이다.

17일 개봉하는 '시몬'은 배우의 변덕 때문에 영화를 못 찍게 되자 가상 배우를 내세워 세상을 속이는 한 감독의 이야기다. 시몬은 가상 배우를 만드는 프로그램인 '시뮬레이션 원'의 준말이다.

빅터 타란스키(알 파치노)는 잇따른 흥행 부진으로 영화사에서 퇴출 당할 위기에 몰린 감독이다. 설상가상으로 촬영 중이던 여배우 니콜라(위노나 라이더)는 계약 파기를 선언한다. 자신에게 제공된 차량이 다른 배우의 그것보다 아주 약간 작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게 끝인가 싶던 타란스키에게 믿을 수 없는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팬이라는 한 엔지니어가 사이버 배우를 만들 수 있는 소프트 웨어 '시몬(S1M0NE)'을 남기고 죽은 것.

시몬으로 만든 배우 '시몬'은 오드리 헵번.로렌 바콜.그레이스 켈리.그레타 가르보.잉그리드 버그먼 등 한다 하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더하고 곱한 뒤 열배쯤 튀겨낸 결과물. 어찌 이 여인을 거부할 수 있으랴. 타란스키는 시몬을 내세워 발표하는 작품마다 승승장구한다.

'시몬'은 대중이 이미지에 얼마나 쉽게 속아넘어가는가를 비판한 소극(笑劇)이다. 이미지를 팔아먹는 스타와 그 이미지를 뉴스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다시 팔아먹는 매스컴, 그리고 속는 줄 알면서도 그 이미지를 기꺼이 소비하는 대중. 스타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속아넘어가는 이들의 모습이 현실과 별 차이 없음을 폭소와 고소를 적절히 유발하면서 꼬집어나간다.

타란스키와 시몬의 관계가 역전되는 대목도 흥미롭다. 그에게 복종하며 부와 영광을 안겨주는 듯 싶었던 시몬은 점차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로 군림한다. '꿈의 여배우'를 없애고자 안달하는 그의 모습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삶에 꼭 긍정적이냐 하는 의문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다만 비판의 날이 결말 부분에 이르러 어이없이 무뎌지는 건 옥에 티 이상으로 심각한 단점이다.

프로그램을 지워버린 뒤 시몬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타란스키가 딸의 재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행복한 가정을 꾸민다는 대단원은 역시 할리우드답게 김샌다.

'트루먼 쇼'의 각본을 쓰고 '가타카'의 각본.감독을 맡았던 앤드루 니콜의 작품. 15세 이상 관람가. 17일 개봉.

기선민 기자

NOTE:'시몬'은 촬영 당시 시몬이 실제 배우냐 아니면 사이버 캐릭터냐 하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크레디트에도 '시몬'이라고 이름을 올릴 정도로 시몬 역을 비밀에 부친 홍보 전략 때문이다. 시몬은 캐나다 출신 모델 레이첼 로버츠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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