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기름 한지에 밴 '전통色 + 현대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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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한국화가들이 당면한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전통의 현대적 변용이다.

정종미(44) 씨는 그런 면에서 특히 돋보인다. 전통 재료와 제작기법을 체계적으로 연구.복원하고 이를 토대로 현대적인 작품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정종미씨의 여섯번째 개인전 '오색산수' (10월 7일까지) 전은 '전통 색의 향연' 으로 불릴 만하다.

작품의 주제나 정서는 전통적이다. 경주의 '남산' 과 '황룡사지' , 할아버지가 읽던 주역( '몽유고서도' ) , 어릴 때의 색동( '색동산수' ) 옷이 그렇다.

"나는 다빈치의 모나리자보다 혜원의 미인도가 좋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보다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 벽화가 훨씬 아름답다" 는 말대로다.

하지만 여기에 구체적 형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붉고 누르고 푸른 색면들이 나눠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깊고도 은은한 색과 질감은 아크릴이나 유화 물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매재(媒材) 자체가 작품인 경지"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를 이룬다.

고려불화의 제작방식을 토대로 재현한 장지(두터운 닥섬유 한지) 기법의 효과다.

장지기법은 종이를 수백차례 다듬이질(도침) 하는,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어깨는 무너질 듯한' 고된 노동에서 시작된다.

다음에 엷은 수간안료를 아교와 섞어 수없이 바른다.

그 위에 콩즙을 올리고 닦고 지우고 훔쳐낸다. 다시 채색을 거듭하고 콩기름.들기름을 칠한 뒤 마지막으로 미리 염색한 모시와 삼베, 다른 한지를 찢어붙여 질감과 공간감을 더했다.

오광수 관장은 "장지기법의 특징은 안료를 섞지 않고 색을 한층 한층 쌓아올리는 방식에 있다. 여기서 은은히 품은 빛, 숨결 같이 고른 표피, 체온을 받아주는 푸근함이 나타나는 것" 이라고 설명한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와 동양화과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1993~95년 미국 뉴욕의 파슨즈 스쿨에서 염색.벽화.판화과정을 공부했다.

"당시 세계 각국의 회화 양식이 총집결된 미국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이 컸다. 우리 전통 회화와 공예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만 세계 속에 설 수 있다고 자각하게 됐다. "

그 때부터 7년간 미국.중국.일본 등의 자료들을 수집.실험해온 결과가 지난 7월 나온 단행본 『우리 그림의 색과 칠』(학고재) 이다.

"고구려 벽화, 고려 불화, 조선 민화, 도자기, 공예, 염색 등에서 나타나는 색에 대한 감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최고의 수준" 이라는 게 작가의 결론이다.

작가는 "일본의 전통회화는 이미 연구와 정리가 완벽해 서양화의 어떤 색채나 효과도 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며 "한국 전통기법은 아직도 확인하고 복원해야 할 부분이 많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내용을 담을 때 한국화의 진정한 현대적 변용이 이뤄질 수 있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02-72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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