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신중국 경제 대장정] 2. 모순의 파노라마 천안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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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펜스는 그의 저서『천안문(天安門)』에서 이렇게 썼다. "중국인은 1912년 마지막 왕조가 몰락할 때까지 황제의 권능이 바로 이 문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러나 금세기의 10년대, 20년대에 이르러 천안문은…중국인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 모순의 파노라마를 묵묵히 지켜보아야 했다. "

자금성(紫禁城) 남쪽을 지키는 천안문은 그 맞은편이 마오쩌둥(毛澤東)주석기념관이고, 좌우에는 혁명역사박물관과 인민대회당이 서 있다. 그 사각 40㏊의 공간이 천안문 광장이고,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들이 여기서 많이 벌어졌다.

광장은 갈 때마다 모습이 변했다. 예전에는 출퇴근 때의 자전거 행렬이 장관이었다. 조용철 차장은 새벽부터 별렀지만 그의 카메라에 잡힌 것은 자전거 출근 대신 극심한 자동차 체증이었다. 관광객의 화제도 왕푸징(王府井)의 패션과 중관춘(中關村)의 전자제품 상가로 바뀌었다.

그리고 돈 냄새다. 8백년 역사의 징산(景山)공원은 자금성과 요인 부락 중난하이(中南海)를 내려다보는 지형 때문인지 내외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산정에는 서울의 보신각 종루 만한 완춘팅(萬春亭)이 있다.

그 좁은 정자 속의 - 그러니까 종루 속의 - 세 귀퉁이에 각각 주인이 다른 가게들이 들어섰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등뒤로 한 바퀴 돌아보려면 기념품 진열대들과 막 부딪칠 판이다. 부처님도 종일 돈 냄새 속에 사신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천안문의 마오쩌둥 초상과 毛주석기념관에 안치된 시신이 그것이다.

천안문에 毛의 초상을 언제까지 걸어놓겠느냐는 이탈리아의 맹렬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의 당돌한 질문에 80년 덩샤오핑(鄧小平)은 "영원히 보존할 것입니다…그의 공적과 과오를 비교할 때 과오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아르곤 가스로 방부 처리했다는 그 시신을 보려고 세 번의 중국 여행에서 세 번이나 찾아갔지만 번번이 알현에(□) 실패했다. 毛 별세 25주기를 맞는 올해의 추모 열기는 특히 심해서 그 굉장한 장사진에 감히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항 저우(杭州)의 시후(西湖)는 중국 최고 절경의 하나로 꼽힌다. 시후를 서시(西施)에 비긴(欲把西湖比西子) 소동파의 제방을 따라가니, 요인들의 휴양지 국빈관이 나왔다. 66년 여름 毛는 국빈관 1호갑(甲)에서 반격의 칼을 갈았다.

총노선.인민공사.대약진정책 등 3면홍기(三面紅旗)의 실패를 '삼분천재 칠분인화(三分天災 七分人禍)' 로 돌리면서 그를 공격하는 실권파(實權派) 1호 류사오치(劉少奇)와 2호 덩샤오핑이 표적이었다.

그해 8월 천안문 성루에서 - 49년 자신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 1백만 홍위병의 환호에 답하며 毛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횃불을 올렸다. 劉는 수모 속에 죽고, 鄧은 유배지로 쫓겨났다. 천안문은 회한의 문이었다.

간 쑤(甘肅)성 란저우(蘭州)에서 우리를 안내한 외사판공실의 리시천(李錫辰)은 문혁 당시 상하이(上海)에서 궐기한 '홍위병' 이었다.

묵은 상처를 건드리는 나의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다 "서른이 넘어 복학하니 인생의 모든 시간표가 늦어버렸다" 면서, 그 치열했던 투쟁의 정열을 고단한 일상 속에 잊으려고 했다.

천안문 광장은 지금 혁명의 함성 대신 청바지 젊은이들의 휴대전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들에게 혁명은 아주 생소한 언어다.

모순에는 파노라마가 따랐다. 투쟁에서 승리한 毛는 문혁을 근사하게 포장하고 싶었으며, 그 일을 鄧에게 맡기려고 했다. 鄧의 과오는 '적대적 모순' 이 아니라 '인민 내부의 모순' 이란 말로 죄를 사한 뒤 은근히 설득했다.

毛는 자존심을 죽이고 문혁 평가에서 '7할 업적, 3할 과오' 의 타협까지 물러섰으나, 鄧은 주자파(走自派)로 몰려 신변 위협까지 느끼면서도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수호지』의 송강(宋江)은 대형 조개(晁盖)를 받드는 척하며 배척하고 나중에 조정에 투항하는데, 鄧이 현대의 송강이라는 비난이 4인방한테서 쏟아졌다. 두 번째 실각이 기다렸다.

천안문 광장 한쪽에 인민영웅기념비가 서 있다. 때때로 여기가 말썽이었다. 76년 4월 청명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생전에 존경해 온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서거를 애도하며 중국 인민들은 여기에 대거 화환을 진열했다.

그러나 周총리를 눈엣가시로 여겨온 4인방이 이를 '반혁명' 행위라면서 강제로 치워버리자, 분노가 폭발한 인민들은 마침내 4인방 타도의 기치를 들었다. 그해 9월 毛 타계의 북새통에 鄧은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천안문이 은인이었다.

문혁에는 추악한 정치 투쟁이 곁들였지만, 사회주의 건설 논쟁이란 한층 본질적인 요소가 들어 있었다.

자유 경작을 외친 劉의 주장은 집단화를 앞세운 毛의 노선과 마찰을 빚었다. 무산/자산 계급의 갈등을 주요 모순으로 상정하고 소유제 개혁을 독려한 毛와, 계급 모순이 해결됐으니 경제 건설에 매진하자는 劉 사이에 먹느냐 먹히느냐의 일대 결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毛는 "小平, 그는 여전히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전히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를 거론하면서 제국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하지 않았다" 고 불평했다.

뒷날 鄧은 "계급 투쟁 몰이해는 나의 지병" 이라고 유유히 되받았다.

천하 대란을 통한 천하 대치(大治)라는 毛의 구상이 문혁에서 얼마나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낡은 것을 부수지 않으면 새 것을 세울 수 없다는 불파불립(不破不立) 교훈은 들어둘 만하다.

점심에 롯데리아(樂天利) 간판을 보고 찾아갔더니 마침 수리 중이었다. 자녀와 함께 서양 점심을 즐기려는 젊은 엄마들로 부근의 맥도널드(麥當勞) 햄버거에도, 켄터키(肯德基) 치킨에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소프트웨어 준비는 시원치 않았다. 은행과 여행사가 신용카드를 피하는 바람에 우리는 족히 한나절을 허비해야 했다. 공정 환율은 1달러에 8.07위안이었으나, 호텔 맞은 편의 암달러상은 8.23위안으로 바꿔주었다.

개혁.개방의 한 단면이 이러했다. 프랑스 포도주(紅酒)로 저녁을 초대한 인민일보 계열 시장보(市場報)의 류궁젠(劉工踐) 편집국장은 그런 미흡과 탈선에도 불구하고 개혁.개방 노선은 결코 수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 순의 파노라마에 후일담이 있다. 89년 죽는 날까지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가 죽자, 그의 민주화 노력을 기억하는 학생들은 부패와 관료주의 척결을 내세우며 천안문 광장에서 일대 궐기에 나섰다.

마침 인민대회당에서 고르바초프를 맞아 국경 문제를 비롯한 중.소 관계 개선에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鄧으로서는 "중국의 고르바초프는 어디 있느냐" 는 광장의 야유와 함성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鄧은 자신의 개혁이 페레스트로이카로 변하고, 자신의 개방이 글라스노스트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천안문이 분노의 표적으로 바뀌었다.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원로들의 간곡한 만류를 무릅쓰고 鄧은 발포를 명했다. 정부 발표로는 폭도 3백여명, 비공식 집계로는 3천7백여명이 희생됐다. 뒷날 유언에서 鄧은 이것이 "생애의 가장 유감스런 사건" 이라고 술회했다.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그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개혁이든 개방이든 인민은 그 뒤 당과 정부가 정한 선을 결코 넘지 않았으며, 행여 넘었다가는 총과 죽음이 기다린다는 지혜를 배웠다. 때로는 더 많은 개혁을, 때로는 더 심한 반동을 천안문은 앞으로도 줄곧 증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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