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동반성장의 선각자 김만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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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국무총리

벌써 세밑이 성큼 다가왔다. 거리에서 구세군 종소리가 함박눈처럼 쏟아져 내릴 12월 22일 오후 2시부터 서울시청 광장에서 ‘김만덕 나눔쌀 만섬 쌓기’ 행사가 열린다. 그때까지 모인 쌀을 소외계층들에 나누는 축제다. 이 자리는 250년 전 우리 사회의 동반성장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선각자 김만덕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고아이자 기생 출신인 제주의 김만덕은 객주를 차리면서 검소와 절약, 시대를 앞선 사업 혜안으로 돈을 모았다. 정조 16년부터 4년간 흉년이 계속되자 제주에서만 1만8000여 명이 굶어죽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 됐다. 이때 김만덕은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을 내놓아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 사람 수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 정조는 이에 감명받아 여성은 벼슬을 할 수 없었던 관행을 깨고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을 내렸다. 또 예외적으로 육지 상륙을 허가해 본인이 소망한 금강산 유람 기회까지 주었다. 김만덕 할망보다 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임)의 표상이 우리 곁에 또 있을까?

 ‘2014년 세계전문직(BPW)여성총회’가 김만덕을 역할 모델로 해 제주도에서 개최된다고 한다. 김만덕의 나눔과 봉사 정신은 대한민국을 뛰어넘어 지구촌 가족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게 되는 셈이다. 또한 김만덕기념사업회는 제주도와 함께 김만덕기념관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이 기념관은 전 세계의 대표 나눔인들을 소개하는 세계 최초 자선기부자 기념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꼽히는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는 세금을 더 내겠다고 자청하며, 400대 미국 부자들에게 개인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자는 서약운동도 하고 있다. 이 사람들과 일부 우리나라 가진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재산과 능력이 아닌 가치관과 처신의 문제다.

 전자는 자신의 부가 누구로부터 창출되었는지를 이해하며, 그 사람들과 동반성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 속에 나눔을 실천한다.

 후자는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면 끝이다. 더군다나 일부 대기업은 문어발 같은 사업 확장과 중소기업 후려치기도 모자라 영세사업 영역인 동네 수퍼마켓까지 차려 버젓이 영업하고 있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내 물건을 팔아준 것이 누구냐? 사람이다. 저기 굶주리고 쓰러져 죽어가는 것이 누구냐? 사람이다. 이젠 내가 그들을 도울 차례다.” 김만덕의 시대를 초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동반성장의 실천, 넓고 깊은 휴머니즘이 집약된 종교적 성찰이다. 김만덕 사후 제주에 유배 온 조선시대 명필 김정희 선생은 만덕의 나눔과 사랑에 감동받아 양손자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라는 편액을 써주어 의로움을 기렸다. “조모께서 굶주린 제주 백성들을 크게 돌본 이유로 정조 임금의 남다른 은혜를 입어 금강산 구경까지 하고 사대부들이 나서서 기록으로 남기거나 노래를 읊기도 했으니 고금에 매우 드문 일이다.”

 2009년에 이어 올해에도 김만덕기념사업회는 중앙일보 등과 함께 ‘나눔 쌀 만 섬’을 모아 김만덕의 나눔과 봉사와 사랑을 다시 실천하려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 ‘김만덕 나눔쌀 만 섬 쌓기’는 유엔이 추구하는 세계 빈곤퇴치와 그 뜻을 같이하는 숭고한 사업”이라며 인터뷰를 통해 공감을 표시했다.

 벌써 초·중학생, 기업·시민·단체들이 쌀이나 기부금으로 동참하고 있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앤드루 카네기는 말했다. 결국 아름다운 동행, 동반성장은 우리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더불어 나누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정 운 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