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애라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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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서에서는 주를 상징하는 곰(웅) 문장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 일이 있다. 「상·갈」주에서 발행한 역서에 『우리주 문장의 곰은 수컷이고 건너편주의 「아펜체르」의 곰은 암컷이다』라고 썼기 때문이다.
대노한 「아펜체르」의 주민들은 그 글을 곧 취소하라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상·갈」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네 곰이 수컷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결국 수컷이냐 암컷이냐 하는 그 곰의 성을 판가름하기 위해 전쟁이 벌어졌고, 2년 동안의 그 싸움에서 귀중한 인명을 잃었다. 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상·갈」주민들이 상대방의 곰도 「수컷」이라고 승인해주었다는 그것뿐이다.
향토애라는 것은 필요하다. 자기 고향을 사랑하고 자기의 피가 섞인 그 흙의 명예를 지킨다는 것은 거의 본능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본능적인 사랑일수록 편견과 맹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기주 문장의 곰이 수컷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듯 하찮은 지방색을 가지고 서로 분쟁을 일으키는 수가 우리 주변에도 많다.
술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직장이나 사회전체에 이르기까지 지방벌이란 것이 작용한다. 심지어는 연속방송극에 나오는 식모들은 어째서 모두 충청도 사투리를 쓰느냐 하는 것으로 말썽이 된 일도 있고, 「하와이」론을 쓴 문필가의 글이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되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있다.
좀 성질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또 도청을 어디로 옮기느냐로 마산 대 진주로 지방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직접 지연이 없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소위 그 연줄이라는 것을 따라 양파로 갈려져있다.
국회에서까지도 그런 모양이다. 도청을 어디로 옮기느냐하는 것은 단순한 명분보다 실리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도 임시수도를 「본」으로 정할 때 말썽이 많았다. 「아데나워」의 고향이「본」근교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선의의 충고를 할 것이 있다면 참다운 향토애를 살려달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중앙집권적으로 되어있는 우리 나라에서는 지방자치의 능력을 키워 가는 것이 향토애의 첫 걸음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지방의 싸움이 걸핏하면 중앙의 무대에서 벌어지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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