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NPT 탈퇴 파장] 북한, 초강수 일변도로 美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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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10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국제사회가 그어놓은 한계선(Red Line)을 넘어섰다.

북한은 비록 "핵무기를 만들 의사가 없다"고 했지만 비핵국의 핵확산금지와 핵물질의 군사적 전용 방지를 위한 NPT 체제에서 뛰쳐나감으로써 핵 개발을 막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는 없어졌다.

북한이 핵 활동이 전력 생산을 비롯한 평화적 목적에 국한될 것이라고 하면서도 "현 단계에서"라고 조건을 붙인 것은 핵무기 개발로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미국이 북한의 요구 사항인 불가침조약 체결에 나서지 않고,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통해 체제 보장을 꾀하는 수순으로 가면 북핵 사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NPT 탈퇴로 북한이 원상 회복해야 할 사항은 더 늘어났고, 그만큼 핵 문제 해결은 어렵게 됐다. 핵 문제의 장기화도 불가피하고 한.미.일 3국간 공조는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또 북한 핵 문제는 한.미.일을 축으로 한 관련 당사국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와 북한 사이로 전선이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 북한 핵 문제가 국제원자력기구(IAEA) 손을 떠나면서 유엔이 전면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은 NPT 탈퇴가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판단할 경우 안보리에 의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유엔헌장 39조).

북한의 이번 조치로 접점을 찾아가던 북.미 대화는 일단 주춤거릴 것으로 보인다. 대북 대화 용의에 이어 공식적인 체제 보장까지 시사한 미국으로선 대화의 장(場)으로 나갈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 국방부와 국무부 내 비확산 담당자를 비롯한 대북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질 것도 변수다.

그래서 북.미간 예비 대화의 색채를 띤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 차석대사-빌 리처드슨 전 유엔대사(뉴멕시코 주지사)간 회동이 본격적인 대화로 이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북.미 양측이 빅딜의 장정(長征)에 들어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이 서둘러 NPT를 탈퇴한 것은 미국의 이라크 개전 전에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측면이 있는 데다 미국도 중동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대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이 지난 7일 대북 대화 용의를 밝힌 미국에 공을 빨리 넘긴 것은 이라크 전쟁 전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가 당장 시급한 현안으로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 미국의 의표를 찔러 미국을 협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응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외교적 해결 원칙에 매달리기도, 그렇다고 한반도 정세를 급박하게 몰고갈 대북 제재에 나서기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됐다.

협상을 통한 해결 방침은 "나쁜 행동은 보상하지 않는다"는 행정부의 원칙을 깨는 것이고, 대북 제재를 비롯한 강경책은 한국과 중.러의 반발에 부닥칠 수 있다.

북한도 "제재는 곧 전쟁"이라고 해왔다. 그런 만큼 미국은 당분간 국제 연대를 통한 외교적 압박의 기조 위에서 유엔 총회나 안보리를 통해 북한 핵 문제를 다뤄나가는 방안을 저울질할 전망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대북 조치가 취해지면 미국의 부담은 줄어든다. 유엔에서 북핵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 우리 정부의 입지는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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