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영화 낚시] '무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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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테지만 어쨌거나 일단 이 영화에선 사람이 너무 많이 죽는다.

아, 정말이지 너무 많이 죽는다. 그런데도 그들이 왜 죽는지, 죽는다해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을 필요가 있는지 나로서는 납득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물론 인간사야 잔혹한 것이고 전쟁은 비정한 것이다.

고려 시대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전쟁만 봐도 그렇다. 그게 현실이다. 문제는 그 '현실' 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데 있다. 잔혹하고 비정한 살육장면을 보여준다고 인생의 잔혹함과 비정함이 자동적으로 필름 속에 담기는 게 아니다.

아무리 상업영화일지라도 좋은 영화 속엔 반드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내장돼 있어야한다. '무사' 속엔 그 질문이 충분하지 않다. 멜로가 없다느니 중심이 분산되었느니 이야기가 산만하다느니 하는 지적은 지엽적이다.

이야기란 별 게 아니다. 이야기는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 그것의 총체일 뿐이다. 따라서 인물들이 허약하면 그들의 행동은 비틀거리고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게 되면서 주제는 허공에 떠버리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그 질문을 '무사' 의 각 인물들에게 던져보자. 그들이 이 질문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우선, 정우성이 연기한 노비 여솔.

그의 고향은 고려가 아니라 할리우드다. '나는 자유인이다'를 읊조리는, 신기에 가까운 창술의 소유자인 동시에 명나라 공주가 홀딱 반할만한 미남자인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미국식 개인주의이며 그의 모델은 할리우드의 고독한 영웅들이다.

안성기가 열연한 진립, 그 인물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지혜로운, 그러나 냉정한 노병은 돌연 감상적 휴머니즘에 빠져들어 우왕좌왕하다가 막판엔 지도력이 의심스러운 장군에게 지휘를 맡긴다. 과연 그가 원하는 건 뭘까□

결국 이 허약한 인물들은 죄없는 몽고군을 학살하는 데에만 열심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귀양길에서 해방시켜준 원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몰살시키고는 그 죄로 쫓겨다닌다.

그러니 이들의 농성에는 동정심이 생기지 아니하고 살육에도 너그러운 미소를 보내주기 어렵다. 공주만 내어놓으면 되는 싸움에서 이들은 끝까지 공주를 지키겠노라며 칼과 창을 휘두른다.

그런데 여기까지 쓰다가 문득, 과연 이런 분석과 난도질이 이 영화에 어울리는가가 자못 의심스러워진다. 이상하게도 '무사' 에는 이런 입방아를 무색케 하는, 거칠고 질박한 그 무엇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 인간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것.

어쩌면 영화에는 이야기나 촬영, 기법을 넘어선 뭔가 있을 지도 모르고 혹자는 그것을 '혼' 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분치는 않으나 '무사' 에는 분명 그게 있다.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된다' 던 싯귀가 '무사' 에도 유효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 '무사'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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